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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사도행전 33] 어느 목회자의 자기 반성과 결단 1 (행 20:17-27)
어느 목회자의 자기 반성과 결단 1 (행 20:17-27)
1.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행한 바울의 목회 돌아봄은 바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본문이었다. 바울과 나 자신을 비교한다면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겠지만, 성경에 나타난 모범된 사역자상, 혹은 목회자상의 한 모습인 바울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목회에 대해 돌아보고, 반성하고, 남은 목회에 대해서 겸손한 결단을 해 본다.
바울의 목회는 어떠했고, 나는 앞으로 어떤 자세로 목회를 할 것인가?
(오늘 묵상 나눔은 목회자로서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말씀 앞에 헌신하고 결단하는 관점에서 나누는 것임을 밝혀 둔다.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나눔이 많음을 양해 바란다).
첫째, 진실한 목회였다.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18).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자신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진실은 누구나 안다. 말을 안해도, 굳이 겉으로 표현하지 않해도, 사람들은 다 안다. 왜? 진실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진리의 세상 가운데 있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섬겼다. 3년의 기간은 한 사람의 진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1-2년 정도는 허니문 기간이라 들뜬 마음으로 지낼 수 있어서 진실을 못 볼 수 있다. 그러나 3년은 그 사람의 진면목을 다 볼 수 있는 기간이다.
그렇게 3년을 보낸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아는 바니…” 이는 바울이 자신이 행한 진실함에 대해서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과연 소망의 성도님들은 나를 보면서 어떤 목회자로 평가할까? 나는 소망의 성도님들께 나의 목회에 대해서 ‘여러분도 아시겠지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 못하다. 이런 질문을 과감하게 물을 수 없을 만큼 지난 목회를 돌아 볼 때 부끄럽다. 이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성도님들 앞에 반성한다.
둘째, 겸손한 목회였다(19). “곧 모든 겸손과…”. 이 표현은 원어적 의미가 ‘굴종적 자세와 같은 굽실 굽실한 태도’를 말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간적 자존심’을 버린 입장을 말한다.
겉으로 겸손한 척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으로 참된 겸손의 자세를 갖지 않고, 겉으로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위선이다. 목회를 하다 보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고, 나의 자아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은 아직도 나의 ‘자아’가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인간적 자아는 죄성에 근거한 것이기에,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데, 아직도 그 자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나의 삶 주위를 맴돌고 있다. 결정적 순간에 드러나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속으로 그 인간적 자존심에 의한 남 판단, 비난 등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죄성에 의한 인간적 자아, 자존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셋째, 눈물의 목회였다(19). 감정에 의한, 자기 연민에 의한 눈물이 아니라, 성도님들을 진정으로 생각하며, 예수님의 ‘자기동일화와 같은 아픔’(empathetic pain)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우신 그 예수님의 눈물을 앤아버와 소망교회를 생각하면서 나는 눈물 흘린 적이 있는가?
넷째, 인내의 목회였다(19). ‘당한 시험을 참고…’. 인내라는 말은 고난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끝까지’ 서 있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 에베소 교회에서의 소명을 주어진 기간까지 소임을 다했다.
앤아버 소망 교회를 목사로서 섬기면서 임기와 관련해서 결심하는 것은 단 한가지 기준이다. 내가 힘들거나, 내가 싫거나(혹은 싫증이 나거나), 내가 다른 곳이 더 좋아서 임지를 떠나지 말고, 오직 앤아버 소망 교회를 볼 때, 목회자의 역량이 교회를 위해서 더 이상 득과 덕이 되지 않을 경우, 그 경우는 반드시 새로운 목회자를 모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있는 사람이다. 교회에 득과 덕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과감히 떠나야 한다. 그것이 목회자로서 몸으로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일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 연민으로 인해 목회현장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임지를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에 불순종하는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떠날 때 떠날 줄 아는 목회자. 그리고 그 때가 될 때까지는 최선으로 충성 다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다시 한번 더 겸손히 결단해 본다.
다섯째, 바울의 목회의 출발은 신앙이었다(19). “주를 섬긴 것과…”. 그의 겸손, 눈물, 인내 등은 자신의 도덕적 품성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 믿음은 신념이 아니었다. 신념은 언제나 자기 한계를 갖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함 받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다.
신앙의 핵심은 21절에 표현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신앙은 회개로 출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신앙을 온전히 갖게 된다. 믿음은 반드시 회개를 전제로 한다. 참된 회개는 회개로 끝나지 않고, 믿음에 의해 시작하였기에, 믿음으로 계속 나아간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목회의 영역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나의 지식, 나의 철학, 나의 정서가 목회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섬기는 그 신앙만이 목회의 출발이요, 근간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전체와 개체를 동일하게 섬겼다(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바울은 전체가 모인 대중적 상황과 함께, 각 개인 성도님들의 집을 방문하여 돌보는 개인적 상황을 균형감있게 같이 보고 섬겼다. 지도자는 이러한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로서 이러한 균형감을 갖는 것 목회의 구체적 목표와 연관해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회가 한 목회자의 목회 범위를 넘어설 만큼 대형화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목자이다. 한 목자가 돌볼 수 있는 양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다. 적어도 경영인이 아니라, 목자라는 개념을 갖는다면 교회는 그 돌볼 수 있는 사이즈를 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가 합당하다’라고 규정적 사이즈를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성도들에 대한 파악은 되어야 하고, 돌볼 수 있는 정도의 사이즈 정도를 말한다.
앤아버 소망 교회는 매 주일 새로운 교우들이 방문 혹은 새로 오고, 또 많은 분들이 학업 혹은 방문 기간을 마치고 한국 혹은 타처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돌봄과 양육이 필요한 곳이다. 너무 숫자가 많은 것은 양육의 질을 떨어 뜨릴 수 있다. 셀 사역을 통한 좀 더 조직적인 양육 또한 필요하다.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성도님들이 진정으로 목양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부끄럽기 그지 없고, 돌아보고, 점검하고, 새롭게 세워야 할 영역들이 너무 많은 것을 느낀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지런히 양떼의 형편을 돌아보고, 섬기자!
일곱째, 담대하게 선포했다(20).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 앞에서 움츠러 들지 않았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26). 이는 에스겔 33:1-7에 나오는 파수꾼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수꾼이 자신의 임무를 다 충실히 하여, 백성들에게 적군의 침입에 대해서 경고했다면, 그는 전쟁의 패배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전해야 할 도리를 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더 이렇게 표현한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27).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하면 이런 결과를 맛보리라 믿는다. 죽으면 살리라! 이러한 믿음으로, 담대히, 진리를 진리로 선포하기를 결단한다.
여덟째, 성령에 매여 인도함 받는 목회를 했다(22). 성령의 사역은 아름다운 사역이다. 성령의 열매가 있기에 그 속에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있다. 사랑도 물론 있다. 성령의 사역은 능력의 사역이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소명을 감당할 능력도 주시는 것이다. 말이 마차를 끌고 가야지, 마차가 말을 끌고 갈 수 없다. 성령으로 인도함 받는 사역은 바로, 가장 힘차게 나아가는 사역을 말한다.
나의 사역은 마차가 끌고 가고 있는 사역이 아닌가? 과연 말이 마차를 끌고 가고 있는 사역인가? 언제나 점검해 보도록 하자!
아홉째, 목숨을 건 사역을 했다(23-25).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23).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24).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5). 이러한 표현 속에는 바울의 순교적 자세의 결의를 볼 수 있다.
목자가 행하는 마지막 사역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나는 교회를 위하여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 각오로 매일 매일 성도님들을 섬기도록 하자!
열번째, ‘하나님 나라만’ 선포하는 사역이었다(25).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25). 바울의 사역에서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하나님만 드러내는 사역이 바로 바울 사역의 핵심이었다.
그렇다. 목회자의 사역에서 ‘세상과 사람은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여야 한다.
(앤아버 소망교회 / 2011년 10월 4일 새벽기도 / www.aahope.net / 배헌석 목사 / pastorbae@gmail.com / twitter:@hunsuk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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