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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요나서/끝] 나는 과연 남을 사랑하는가? (욘 4:1-11)
하나님 여호와를 선포하라! (요나 4:1-11)
1.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 ‘바보’가 구사일생으로 한 사람으로부터 밧줄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위에서 던져준 밧줄에 겨우 의지해 살고 있는 바보가 밑에서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이 밧줄을 놔 버리면 위에 있는 저 사람이 뒤로 나자빠지겠지!’ 바보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밧줄을 놓는 순간 자신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바보에 관한 얘기지만, 실은 우리들이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 유머에서 바보는 ‘자기 중심적 생각’만 한다. 그러기에 그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한 것이다. 실은 우리의 삶은 바보 같은 삶으로 대부분이 가득 차 있다.
2.
요나는 바보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는 끝까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니느웨가 회개하자 그에게는 다시 자기 중심적인 바보 같은 생각이 되살아 난다. 인자하신 하나님을 자기에게만 적용한다(2).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왜 자기에게만 인자해야 하는가? 만약 구원의 하나님을 자기에게만 적용한다면 그 얼마나 이기적인가? 구원받은 자가 전도하지 않으면, 그 얼마나 이기적인 구원관인가?
요나는 니느웨 성읍 동쪽으로 가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돌아가나 살펴보려 한다(5). 그의 의도는 사촌이 땅을 사자 배아픈 가운데, 그 땅 갖고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를 보려고 하는 나쁜 심보를 가졌다. 니느웨가 회개를 하면 얼마나 회개를 했을까? 그들의 회개가 진정으로 참된 회개일까? 그들이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이 뻔하지 않을까? 등과 같이 은근히 니느웨의 회개를 의심하고, 폄하하는 모습이 요나의 모습에 보인다.
그의 마음은 박넝쿨 하나로 왔다 갔다 한다. 더운 대낮에 박넝쿨이 그늘이 되어 주자 그는 매우 기뻐한다(6). 그러나 하루 아침에 박넝쿨이 벌레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되자 그는 죽고 싶다고 한다(8). 그리고 박넝쿨 하나 가지고 성내는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자 요나는 ‘자기 생각이 끝까지 옳다’라고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대들고 저항한다(9).
요나를 보면서 정말로 ‘요~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모습에, 나의 모습에 요나의 모습이 그대로 있음을 보게 된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한다. 물고기 깊은 뱃속까지 들어왔다 나와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모습은 계속된다.
‘정말 바보아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래. 정말 나는 바보이다.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진짜 바보이다.
3.
‘바보’와 ‘바보 아님’의 차이는 단 한가지 이다. 내가 부족함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이다. 다 바보이다(내가 보기에). 그러나 단 한가지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바보임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카톨릭 계통의 학교를 다녔다. 추첨제였기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니게 된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미사(예배)를 드렸다. 미사는 여러 가지 미리 정해진 순서 따라 행해지는 별 생동력이 없는(?) 그런 시간으로 내겐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지금도 기억나는 순서가 있다. 그것은 손으로 가슴을 실제로 치면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부분이다.
사회를 보면서, 사람을 보면서, 자신을 보면서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되, 그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때문임을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도 ‘내 탓’의 소리는 내 가슴에 울리고 있다. 그리고 이 고백으로 인해 이 사회와 나 자신은 조금씩 ‘바보’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는가 싶다.
4.
하나님은 참으로 귀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바보 같은 요나를 향하여 끝까지 다가 오신다. 풍랑도 준비하신다. 큰 물고기도 준비하신다. 박넝쿨도 준비하신다. 뜨거운 동풍도 준비하신다. 요나의 바보 같은 항변에도 끝까지 친절하게, 자상하게 답변하신다.
그런 하나님이 나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시기에 지금까지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싶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계속 다가 오신다. 바보같이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정말 바보같이(?) 계속 다가 오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새삼 느낀다.
요나는 바보 같은 모습을 가졌지만, 그 또한 순진한 면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의 치졸한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다 내뱉는다. 다른 사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내뱉지 않는다. 그에게 하나님은 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모든 질문, 아픔, 괴로움을 토로한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둘 다 죄인이고, 자기만 생각하는 바보 같은 자들이지만, 한 쪽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바보스러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답을 얻는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얻으려고 한다. 정답이 나올까?
5.
정답을 얻을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퍼부어야 한다. 그 정답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6).
요나서를 누가 기록했을까? 바로 요나이다. 요나는 짧은 요나서 전체 네장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표현을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 즉 ‘여호와’라고 표현한다. 여호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관계에 계신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측면이 강조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열방의 하나님,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쓸 때는 ‘여호와’라는 표현 대신에 ‘하나님’(엘로힘)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여호와’만이 아니라, 또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열방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신 것이다.
그랬을 때, 그는 니느웨 백성들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 여호와’를 선포하고, 부르짖게 된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를 깨닫고, 선포하게 될 때, 비로소 니느웨 백성은 더 이상 요나의 배를 아프게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동일하게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언약 관계로 들어가는 형제, 자매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정답 얻은 인생이 아니다. 그 정답은 하나님께로만 나온다. ‘하나님 여호와’의 깨달음과 고백이 우리 가슴에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정답 인생을 살게 된다. 그 정답을 얻을 때까지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지 말고,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다 비워야, 가장 밑바닥까지 가서 그 바닥을 쳐야 ‘제대로’ 다시 올라 올 수 있다.
(앤아버 소망교회 / www.aahope.net / 2011년 10월 26일 새벽 메시지 / 배헌석 목사 / pastorbae@gmail.com / twitter:@hunsuk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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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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