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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수] 올바른 담대함=진리+진실 (마태 27:11-26)
(설교 시간: 16분)
담대함 (마 27:11-28)
담대하게 산다는 것은 용기 있게 사는 것이고, 당당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멋진 삶입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은 힘든 상황을 맞이하거나, 어려움을 맞이하게 되면 담대함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암에 걸리게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치료법 중에서 어떤 치료법을 선택할 지를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라는 것이 설문 조사의 요지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의사 혹은 가족 등에게 선택하도록 도움을 요청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65퍼센트의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암에 걸린 환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물어 보았습니다. 답변은 확연한 차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직 12퍼센트의 암 환자들만이 치료법 선택을 스스로 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막상 암에 걸렸을 때,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용기가 그만큼 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실제 힘든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담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담대하게 사는 것은 자신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좋습니다. 신납니다. 당당합니다.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천하의 바로 왕 앞에선 모세처럼, 2미터가 넘는 골리앗 앞에 선 목동 다윗처럼 담대함은 멋지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나 온 역사 속에서, 모든 정황 속에서 가장 담대하게 살아가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은 로마 황제를 대표하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자신이 유대의 왕’이라고 담대히 말씀하십니다(11). 예수님의 이러한 담대함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담대함과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위축되거나, 회피하거나,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장 담대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러한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담대함의 공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담대함은 자신의 힘만 믿는 잘못된 담대함, 만용을 말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담대함을 말합니다. 그 올바른 담대함의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담대함(boldness or bravery)=진리(truth)+진실(sincerity)!
예수님은 먼저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십자가 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발언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같은 본문의 평행 구절이 있는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십니다(요 18:37).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고, 그 하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인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도, 바꿀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귀중한 향유를 붓는 여인의 섬김을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2-13)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행위는 단순한 용기 있는 죽음, 사랑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유일한 죄 해결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유일한 진리의 길이기에 그 어떤 다른 길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십자가의 길만이 유일한 진리의 길입니다. 그 어떤 다른 길도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시면 안됩니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그 진리의 길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면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지 못하시도록 방해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한번 더 예수님의 이 십자가 길을 말고의 귀를 자름으로써 못 걸어가시도록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예수님께는 세상의 모든 군대가 다 동원되어 대적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또 다른 물리력, 즉 악으로 대항하면 더 큰 악, 악순환이 계속 되기에, 그것이 진리가 아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의 길은 십자가의 길, 이 길뿐 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올바른 담대함을 갖기 위해서는 진리를 아는 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리를 삶으로 살아가는 것, 이를 ‘진실(sincerity)’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에 아무 대답도 안 하십니다(12). 이는 자기 변호를 거부하심으로써 실제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겠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인 십자가를 가리켜 주시면서, 우리보고 그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진실하셨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길을 진실하게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빌라도는 경이롭게 여깁니다(great amazement of the governor). 성도가 세상에서 이 십자가의 진리의 길을 진실하게 걸어갈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보면서 경이롭게 여깁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나 성도가 십자가라는 진리는 많이 외치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는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를 보면서 경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경멸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라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명높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NIV, notorious). 그러나 ‘악명높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중성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탁월한’ ‘눈에 띄는’이라는 뜻입니다. 한글 개역 개정판에는 ‘유명한’이라고 중성적인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악명높은 악한이라면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겠습니까? 실제로 바라바는 로마 압제하에서 독립운동을 꾀한 독립 투사, 민족주의자, 열혈당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라바를 살려 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참된 진리의 길 대신에, 진리가 아닌 비진리를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바친 ‘무모한 용감자’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길 대신에 폭력과 힘으로 자신의 조국을 독립시키려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국가를 사랑하고 애국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력과 폭력의 방법으로 국가를 섬긴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집단 이기주의, 칼이 또 다른 칼을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 고리만 만들어 냅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진리의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바라바는 잘못된 진리를 열정과 헌신을 다해 실천하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안식교 등의 이단들은 그 기본적인 특징이 열심입니다. 열심 자체는 중요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열심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잘못된 열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선한 구제의 일을 열심히 하고,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이 모든 근본 동기에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없이 ‘열심’으로 행하는 삶이라면 그 삶 속에는 분명히 무모한 용감자의 잘못된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빌라도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예수님에 대한 진리의 삶을 알았습니다.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눅 23:4). 빌라도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이유가 정치적,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치졸한 헤게모니 투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중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습니다(막 15:15). 그는 진리를 진실하게 말하는 것에 담대하기 보다는 대중을 두려워 했습니다.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24). 그는 손을 씻음으로서 진리를 회피했습니다.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사람들에게 떠 넘겼습니다.
진리를 아는데,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삶을 진실하지 못한 삶이라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신자로 살아가고, 삶의 현장에서 성도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 또한 진실하지 못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진리를 자신의 목숨으로 삼아야 합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의 꿈 얘기를 하면서 예수를 죽이지 말라고까지 합니다. 아무리 아내가 간곡히 하는 얘기를 들어도, 아무리 꿈과 환상의 얘기를 들어도, 아무리 진리의 말을 들어도, 그 진리를 자신의 가슴 속에 품지 않으면, 자신의 삶으로 소화하지 않으면 결코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가장 큰 문제는 진리에 대해서 알았지(know about), 진리 자체를 안 것(know truth itself)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진실하게 붙들고 살아갔습니다. 진리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늘 물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갔습니다. (구약) 성경을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진리의 토대 위에 세웠습니다. 그 진리(말씀)대로 실제로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첫번째는 기도였습니다. 중간 중간도 기도였습니다. 마지막도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사역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사역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다 마쳤을 때, 가룟유다는 로마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기도로 예수님은 말씀인 진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 들였고, 손과 발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십자가를 바라 보시고, 기도에 의지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진리를 진실하게 수행 하심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담대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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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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