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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간: 19분)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께서 말씀(명령)하시는 대로 살라!

---

성령 받았으면 성령 따라 살라 (갈 5:13-26)

옛날에 한국에는 양반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말은 양반보다 아래 계층인 소위 상놈, 종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반 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종들이 더 이상 종이 아닌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었던 자들이 길을 가다가 과거의 주인을 만나게 되면
굽신 굽신, 안절 부절  하는 모습을 계속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 종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자유를 얻은 성도가 다시 옛날의 종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한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값이
그렇게 싼 것일까요?

예수의 십자가 값에 대해서 너무 성도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공짜로 주신 은혜, 구원이기 때문에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도가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물질주의, 외형주의, 성취주의, 율법주의에
종이 되면
그만큼 십자가의 예수님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미 할례를 어릴 때 다 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방인으로서 기독교로 입문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당신들도 할례 받아’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시 육체의 노력으로, 외형과 외식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그런 모습이 있지 않나요?

신앙인이면서
목회자이면서
교회로서
겉치레
성장위주
경쟁주의에 사로 잡히면 그것은 또 다른 율법에 얽매이는
종의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겉모습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경쟁하는 노력의 자세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함이 없이
순수함이 없이
은혜로 받게 된 구원의 감격과 감사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섬김과 노력이 아닌
부담과 욕심으로 행하는 그런 노력은
이 시대에도 갈라디아서가 다시 한번 더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은 자유함 입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 보기에 바쁩니다.
실적이 안 좋으면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직분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 간에 지나친 경쟁으로 나아가고
직분자들이 영혼 자체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외적인 성과 위주로 평가하는 모습을 갖게 된다면
그러한 모습은 또 다른 종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다음 단계를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장입니다.

자녀가 일년, 십년이 되어도 자라지 않고
계속 어린아이로 있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마감하면서
바울은 이제 자유의 신분을 넘어서
성장과 성숙의 삶을 말합니다.

그렇게 자유한 자가 더 큰 사랑과 섬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원해서 남을 섬기는 것을 ‘자원 종’이라 합니다(13).

달리 표현하면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유자의 신분을 넘어서 자원종의 성장과 성숙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성도가 된 이후 계속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외형을 보고 판단합니다.
이슬람 권에서는 선행을 베풀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천국에서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배웁니다.

그래서 이슬람 권에서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엄청난 선행을 베풀어 줍니다.
이들은 이렇게 착하게 사는 것을 평생 가장 바른 삶으로 알고
그렇게 하루 5회씩 기도하면서, 선행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러한 착한 삶 자체가 문화가 되어 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매우 매우 착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런 외적인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감동을 받습니다.
저도 제 주위에 있는 무슬림들을 보면서
엄청나게 감동받는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쩌면 저렇게 신실하게
엄청나게 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이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천국의 보상 때문에
문화화된 삶의 양식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서구화 되어가는 이슬람권 지역을
선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공위성으로 텔레비전을 수신하는
접시 안테나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위 말해서 서방의 물질세계,
개인주의화된 사회 맛을 이들 젊은 무슬림들도
많이 배우고(?) 영향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권 지역이
더 이상 착하고 선한 이미지의 무슬림 모습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마을이나 지역을 방문해도
더 이상 재워 주려고 하거나, 최고의 음식을 대접하려고 하는
경우를 옛날 처럼 그렇게 쉽게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아직도 착한(?)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은 매우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지 진정한 성도들의 자세는
복음, 진실한 진리의 복음을 진심으로 들고 들어가야 합니다.

도덕주의에 현혹되어 아직도 문화화된 착한(?)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든지,
아니면 타락한 서구 문명에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무너져 가는
이슬람 사상 속에 사는 자들에게든지
그 누구에게든지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은 진리로, 진실로, 진심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전하는 방법은
메시지로,
진리를 선포함으로,
그리고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감으로
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말로만 전하고
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이율배반적이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원종의 모습이라 말합니다(13).
그렇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중요하기에
자원해서 그리스도의 종, 군사,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자원종이라 합니다.

이들은 몸으로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자원해서 일용할 양식으로만 살아갑니다.
삶이 간편합니다.
삶이 초점이 있습니다.
영혼구원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적인 삶에 자신의 남은 인생을 겁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자원 종’이 되어서 살아간다면
분명히 타종교에 대해서 진리를 가장 영향력있게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 이단도 사라질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는 그런 율법주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내부로부터 약화 시킵니다.
그런 모습, 인간적인 모습, 죄된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보면서 기독교와 자신들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무슨 전도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삶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 성도들을 보면서
‘당신 정말로 구원 받은 것 맞아?’
‘열매로 말해봐!~’라고
말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런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의 삶에서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나는
8복의 모습이 없다면
‘당신, 구원 받지 못할수도 있어…’
라고 집요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믿음으로 인한 행위의 열매라는 관점이라면 맞지만
자칫 잘못하면
‘열매를 통해 구원받는 행위구원’으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그렇게 해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열매없는 신앙인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열매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는 신앙인,
이웃까지 내 몸처럼 사랑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렇습니다.
노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내가 예수를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성도 안에 내주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성령을 구하면
성령께 구하면
성령의 열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이 죄송하게도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성령, 기도를 압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께 구할 수 있고, 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이는 하나의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9가지 열매를 단수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께 간구하면 9가지 열매가 동시에 내 삶에 맺혀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9가지 열매는 실적, 외적인 결과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해 맺게되는 열매입니다.
인내, 자비, 양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갖게 되는 나의 자세를 말합니다.
충성, 온유, 절제는 자기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속에서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9가지를 성령을 의지하면 동시에 맺을 수 있고, 맺어야 합니다.

이 9가지 열매는 성도가 선행을 행하는 기준입니다.
그 사람이 더 많은 전도, 더 많은 선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은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삶과 관련해서 자신을 점검합니다.

9가지 열매로 자신의 내면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죽어도 못외우시면 손바닥에 적어 놓고 다니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돌석자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 저도
외웁니다.  왜?  중요하다고 믿고, 자꾸 보게 되니까.

저는5초 기도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매 상황마다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을 외칩니다.
그리고 점검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간구합니다.

내 힘이 아닌, 성령의 열매로 살게 해 달라고…

이렇게 매 순간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찌니라’
정말로 멋지 말인데
처음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어로 보면 쬐끔 더 이해가 갑니다.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25)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성령 안에서 ‘걸어 가야’ 즉 ‘살아야’ 합니다.

걷는다 라는 헬라어는 군대 용어라고 합니다.
군대에서 좌향좌, 우향우 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자주 고문관이 나타나죠.
남들이 다 좌향좌 할 때
어떤 사람은 우향우 합니다.

상관의 명령에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의 상관은 성령님입니다.
성도는 ‘자원종’으로서 영적 군인입니다.
상관되시는 성령님의 명령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심혈을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통역할 때가 있는데
원래 영어를 못하는 상황인지라
더더욱 통역할 때는 영어 표현에 귀를 기울입니다.
전심으로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야 통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슬람도, 타종교도 겁나지 않습니다.
그런 성장, 성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라디오 주파수는 가끔 놓칠 수 있어도
핸드폰 접속도는 아예 막대기가 하나도 화면에 생기지 않아서
통화하다가 끊길 수 있어도
성령의 주파수는 끊기지 않아야 합니다.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의 말씀에 24시간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 오늘도 글을 써 놓고 나니 매우 긴 장문이 되어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  ^

저도 다시 읽으면서 이렇게 길게 쓰다니…. 쯧 쯧 쯧 했어요.

저의 이 말에 많은 분들이 공감(?) 하시리라 믿어요~~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일단 한번 이 글을 읽으시고
그리고 나중에 정신이 더 맑아지시고
또 나중에 힘이 좀 나신 다음에
한번 더 찬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종->자녀->자원종의 개념을 갖고 읽으셔서
열매로, 몸으로 말하는 신실한 신앙인 되시기를 바랍니다.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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