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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간: 17분)

[묵상 포인트]
1. 사람들은 늘 진리를 찾는다.
- 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이 찾는 것이다.
- 스바 여왕도 참 진리, 참 지혜를 찾아 솔로몬 왕에게 왔다.
- 당신은 진리를 찾았는가?  당신은 진리를 가리켜 주고 크리스천인가?

2. 하나님만이 참 진리, 참 지혜의 근원이시다.
- 솔로몬의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이다(1).
-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3. 성도가 참 지혜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게 된다.
- 스바 여왕은 솔로몬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로부터 찬양받는다.
- 성도는 성도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해야 한다.

4. 결론 및 적용
- 세상 속에서 사는 크리스천인가(in the world)?  아니면 세상에 얽매인 크리스천인가(of the world)? 
- 내 속에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존재 하시는가? 


[더 넓고 깊은 묵상의 세계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인가, 세상에 영향을 끼칠 것인가  (왕상 10:1-13)

1.
예수님은 성도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자신들끼리만 있지 않고, 세상 속에 있어야 제대로 역할을 하듯이, 성도는 교회 안에만 있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가서, 그 속에서 성도로서 살아야 바른 성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 자신을 한번 돌아 봅니다.  과연 성도로서, 목사로서 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물론 목사의 본분이 교회를 바르게 섬기고, 성도로 하여금 온전히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자라고 한다면 교회 안에서 사역하는 영역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임상 경험과 능력이 없는 의과대 교수가 강의실에서만 수술에 대해서, 치료에 대해서 강의할 수 없듯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는 목사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사는 것이 맞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목사가 세상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살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시각만 갖는 것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표현대로 성도는 한 손에 성경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하듯이 그만큼 세상을 제대로 알고, 세상에 제대로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저 자신을 볼 때 너무 교회 안의 사역이 바쁘다 보니, 막상 일반적인 삶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대부분이 기독교 용어와 감각으로만 점철하는 자신을 보면서, 뭔가 예리한 돌아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성전에서만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의 예배와 영성의 삶을 ‘왕궁’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적용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균형 잡힌 삶은 세상에 하나님을 선포하는 전도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참된 소금과 빛의 삶이었습니다.


2.
왜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까?  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일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스바 여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은 오늘날로 얘기하면 예멘(Yemen)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솔로몬이 있었던 예루살렘까지는 약 2,400 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많은 수행원과 물품들을 들고 방문해야 하는 당시로서는, 그리고 교통 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매우 먼 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찾아 옵니다.  사람들은 참 지혜를 구합니다.  참 진리를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는 진리는 찾는 역사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역사와도 같습니다.  인간은 결코 빵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빵만 준다고 사람들은 결코 행복해 하지 못합니다.  전쟁의 공포도 없고(영세 중립국이기에), 복지 혜택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그런 스위스와 같은 복된 나라들에도 자살율이 매우 높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코 물질이, 삶의 외적 행복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찾아온 것은 이러한 참된 지혜, 참된 진리를 구했듯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그 참된 진리를 찾아 다닙니다.  누가 그 진리를 가진 자들입니까?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담대하게 누가 감히 선포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진리의 근원자이기에 하나님은 그렇게 선포할 수 있으십니다.

내 안에 그 진리로 인한 기쁨과 자유를 먼저 확인하십시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과 진리로 인한 자유함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확인되었다면 이제 세상을 향하여 나누고, 표현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갖고 있는 성도가 그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계속해서 방황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찾아 헤매는 일만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결코 분리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 삼아야 합니다.  세상과 접촉점을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가 자칫 잘못하면 세상과 분리될 수 있습니다.  소금만 있으면 소금 덩어리가 되고, 짜기만 하지, 결코 제대로 역할 하지 못합니다.  빛은 어둠 속에 있어야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과 분리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산 속에 지어서는 안됩니다.  수도원이 필요하지만, 교회는 개방되어야 하고, 교회의 문턱은 낮은 것이 아니라 아예 문턱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오라고 예수님처럼 손을 벌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듯이, 어린이들을 오지 말라고 하지 않듯이, 교회는 개방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접촉점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표현 속에 나오는 말씀은 로고스라는 표현입니다.  로고스는 만물의 원질, 원리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는 그리스 로마 철학이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로고스, 즉 만물의 근본 원리를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들이 늘 사용하던 로고스는 당시 일반 철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러한 용어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당시 순수한 지성인들이 사용하던 그 용어를 크리스천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감히 세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찾는 ‘세상의 근본 원리’ 즉 로고스는 바로 하나님 이라고 설명합니다(이재철 목사님의 “청년아 울더라도 씨를 뿌려야 한다”에서). 

사도 요한은 세상의 영역 밖에서 하나님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들이 찾고 있는 진리에 대한 열망을 간파하고 그들에게 진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들은 실은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그러나 과거 로마 시대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중범죄자를 다루는 사형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잔인한 사형 형틀을 기독교의 핵심 상징물로 사용하였습니다.  세상 속으로 가서 세상을 변혁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접촉점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문화 코드를 읽어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언어는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을 필요하다면 사용하여 새로운 세계관을 갖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자세입니다. 


4.
그러나 교회는 세상 안에 있지, 세상에 속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순수성을 늘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배가 땅이나 육지에 있지 않고, 바다나 강으로 가야 하듯이 교회는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배는 물 속으로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침몰입니다.  배가 물 위에 떠 있어야 배의 역할을 하듯이, 교회는 세상으로 가되,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교회나 성도가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라는 물에 침몰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세상과는 아예 큰 담과 벽을 쌓고 분리된 모습을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영적 긴장감을 가져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별(distinction)되지만, 분리(separation)되지는 않는 그런 자세를 늘 점검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속에 있는 참다운 교회가 됩니다.


5.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실천들이 필요합니다.  매일 신문을 읽을 때 마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정확하면서도 면밀하게 살펴보고, 기도로 세상을 섬기며, 구체적인 복음을 그들의 삶의 정황에 실어 줄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은 세심하면서도, 예민하면서도, 포용적이면서도, 실제적이면서,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적용해야 할 예들은 많이 있습니다.  아주 많이…  한 예로 교회라는 건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을 일주일에 한 두 번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당이라고 하는 예배실은 예배 드리는 장소로만 꾸며져 있기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두번 드리는 것으로만 교회의 가장 큰 공간, 가장 큰 돈을 들인 공간이 사용됩니다.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건물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당을 비롯해서 교회의 모든 부속 건물들은 실은 세상 속의 소금과 빛처럼 개방적으로 사용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세속화의 극치를 달리는 그런 용도, 예를 들어 사교 클럽, 술집, 나이트 클럽 등으로 사용될 수는 없겠죠.  그러나 주중의 문화 교육 공간으로 교회 건물은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교회 건물로만 모여서는 안됩니다. 집을 개방해야 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 공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삶속에 스며 들어간 신앙의 능력과 기쁨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셀 모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 건물이 그렇게 클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건물에 너무 예배의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다고 다른 용도로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정한 성전은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개인 삶과, 성도들의 관계로 인한 모임을 말하는 것이지,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 건물은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 하도록 건축되어야 하며, 사용되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건물이 너무 세속적인 문화의 옷을 입음으로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데 지나친 방해가 되는 요소들로 장식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실천의 예들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끌려 가서도 안되고, 세상과 등져서도 안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혁 시켜야 합니다.  날마다 ‘분리대신 구별’이라는 영적 깨어 있음에 대한 점검을 늘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twitter:@hunsukbae / www.aahope.net)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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