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6일 주일 설교
하나님과의 친밀함 (요한 16:25-33)
1.
요즈음 자살 소식을 많이 듣습니다. 사람들이 자살 할 때는 적어도 세가지 요인이 동시에 원인이 될 때 자살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삶의 허무감’(Meaningless)입니다. 요즈음은 20대가 이러한 허무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부유한 세대이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대로, 그리고 게임 등과 같은 결과, 점수 지향적인 삶을 살다 보니 쉽게 허무감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희망을 잃는 좌절감’(Hopeless)입니다. 한국 남성들 가운데 40대가 가장 병으로 인해 사망하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도, 40대가 갖는 상대적 상실감은 다른 세대보다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가장 왕성하게 일 할 나이이고, 또 그 동안 닦아왔던 사회적 노력 및 기반 등을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의 해고라는 충격을 받을 때 좌절케 되는 심정은 쉽게 자살충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아무도 날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소외감’(Helpless)입니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누군가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도움을 요청할 희망이라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허무감도 있고, 좌절감도 있는 상황가운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단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이렇게 허무감과 좌절감을 넘어,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잊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가장 힘들고, 가장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되는 상황이 된다 할찌라도, 자신 옆에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잊는다 할찌라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이해해 주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있다면, 소망을 갖고 다시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위급한 상황, 가장 절망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아니면 가장 큰 기쁨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연락하고,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2.
이러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런 친밀함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intimacy with God,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25절에 보면 지금까지는 비사로, 말을 돌려서, 비유로, 수수께끼로 하셨는데, 이제는 밝히 말씀하십니다. 26절에 보면 지금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우리가 직접 기도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가까워 졌음을 의미합니다. 27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아주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을 갖고 계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30절에 보면 제자들이 ‘우리가 믿삽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믿음 고백에 대해서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믿느냐?’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반어법을 쓰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힘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다음절에 우리들이 배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로 주님이 가시자 다 떠나갔습니다. 3년 동안 공들였던 제자들이 다 떠나 갔습니다. 배신했습니다. 가장 외로웠습니다. 가장 도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절에,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절에 보면, 이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고 체험한 예수님께는 그 속에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평안함으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하지만,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엄숙하시고, 무서운 분, 거리가 있는 분이라고 알기 쉬운데, 실은 에덴 동산에서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와는 완전히 허물이 없었습니다. 엄숙하신 하나님이라기 보다는, 아담과 하와에게 아무런 가림 없이, 벽없이 그렇게 교제하신 성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까지 낮아 지셨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을 좋아하지만,
제가 어린이들과 같은 수준의 놀이, 즉 베지테일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수준을 같이 하셨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여기서 교제는 영어로 fellowship 입니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 입니다.
이를 KJV에서는 commun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살과 피. 즉 성찬식을 커뮤니온 서비스라고 하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파라클레이토스. 즉 우리가 범죄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자로 함께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동행하시기 때문에, 성도가 탄식하고, 괴로워 하는 것은 우리 속에 계시는 그 분이 탄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탄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보며, 아파하고
또 주위를 보면서 아파해야 합니다. 그 분이 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은 이러한 친근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아무도 없을 때 낮 12시에 물 길으러 오는 것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났을 때, 그물에 고기가 없는 것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과부가 헌금하는 두 렙돈, 즉 페니 같이 너무나 미약한 가치의 돈이기에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세한 소리에도 주님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해 주라는 그 주님의 말씀 속에는 내가 너를 용서하리라 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가 가장 크게 깨달은 구절이 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다윗이 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분명히 반어법적인 뉘앙스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자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못하듯이,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버려도,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버려도, 주님은 여러분을 안 버리십니다. 그래서
intimacy with God,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표현했지만, 따져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친밀하게 보시고, 다가오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Intimacy of God, 즉 하나님의 친밀하심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맞다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여러분들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여러분들을 버려도, 하나님은 성도들과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배헌석 목사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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