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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묵상 5] 분리와 구별, 그리고 아디아포라의 문제 (고후 6:14-7:1)
거룩의 문제-구별과 분리의 문제 (고후 6:14-7:1)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장황하게 앞에서 말을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비아냥 거린다.
‘저 사람, 또 설교하고 있네…’
‘설교’라는 좋은 단어가 좋지 않은 이미지로 사용되는 한 예이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사람들이 역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는 분리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너무 분리주의의 모습으로 보여지면 옳은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리주의의 모습을 갖지 않으셨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대화하셨다.
문둥병자, 죽은자와도 접촉하셨다.
바리새인, 부자 등과도 대화하셨다.
예수님은 결코 분리주의의 모습을 갖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타협주의의 모습을 갖지도 않으셨다.
강한 욕과 비판,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분리와 구분의 문제를 언제나 정확하게 하셨다.
그래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지는 않으셨다.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라고 하시면서, 세상에서 성도가 해야 할
본분을 정확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가져야 하며(담대하게)
또한 타협하지 않고, 늘 정확하게 살아 나아가 한다.
이러한 분리와 타협의 문제, 분리와 구분의 문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정립해야 한다.
바로 앞의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3)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14)라고 완전히
돌변한 표현을 행한다.
삶에서 ‘분리’해야 할 영역이 있다. 그래야 거룩이 보장된다.
그래야 능력있는 전도가 행해 질 수 있다.
신앙인의 삶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영역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완전히 분리해야 할 영역이다. The area of separation
14-16절.
의는 불법과 결코 같이 갈 수 없다.
불법과 같이 가는 순간 의는 더 이상 의가 아니다.
빛과 어두움은 그 자체가 물과 기름처럼 나뉘어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조화 될 수 없다.
벨리알은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성경에는 ‘벨리알의 증인’(잠 19:28),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나오는데, 이는 거짓 증인, 음모를 꾸미는 자 등의 의미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성전과 우상. 이 또한 완전히 다른 영역이다.
어떤 영역이 분리해야 할 영역일까?
쉽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영역들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도박. 그렇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고 하셨다. 일확천금.
횡재, 재수 등은 기독교인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로또, 복권 등은 기독교인이 행해서는 안되는 영역이다.
마약.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
살인.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
혼전동거.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한다.
복수 결혼. 이 또한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
첩을 두는 행위를 해서는 결코 안된다.
불신자와의 결혼. 이 부분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는 영역이다.
성경 전체를 볼 때, 이 부분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인본주의로 인해서 결혼을 인간의 선호도에 의해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언약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 영역은 철저하게 분리해야 할 영역이다.
이렇게 분리해야 할 영역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이러한 부분에서 타협해 버리면
처음에는 좋을 것 같지만,
나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욕을 먹게 된다.
술의 문제가 그러하다.
담배의 문제가 그러하다.
이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 속에서 분명하게
분리의 문제로 규정되고 있다.
성경의 정경성, 권위에 대해서
인간의 잣대로 성경을 봐 버리게 되면
결국 인본주의, 영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 결과 가장 중요한 인간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는 경우를
오늘날 많이 볼 때
우리가 넘어가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둘째는 구분해야 할 영역이다. The area of distinction.
7장 1절을 보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했다.
육과 영의 영역을 다 얘기하고 있다.
이 말은 무엇인가?
육의 영역도 거룩해야 할 영역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은총의 영역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팝송, 가요 등을 들을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이 군대를 갈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반 직장을 갈 수 있는가?
그렇다.
오히려 더 가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회사만 들어갈 것이 아니라,
좀더 전투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일반 회사를 들어가서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루터는 카톨릭의 예배 형식을 물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시편의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당시의 일반 가요에
이러한 성경적, 개혁적 가사를 붙여서 찬송을 하게 하였다.
결국 루터의 입장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건설하도록 방향을 잡도록 인도해 주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기독교인들은 분리의 영역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모든 영역으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자신감이 있으면 훨씬 담대하게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성을 너무 높게 쌓아서는 안된다.
자신감있게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는 아디아포라의 영역이다. The area of adiapora.
이는 가치 중립적인 영역을 말한다.
예배당 카펫 색깔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도 되는가? 등이다.
노래방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래방 자체, 노래 하는 것 자체 등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이런 영역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 자유함을 가져야 한다.
너무 분리의 모습을 가져서는 결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아디아포라는 없다고 한다.
어떤 영역이든지 무엇을 위해서, 왜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아디아포라의 영역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할 ‘구분’의 영역인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오늘 행하는 이 일,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일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는가?
이를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정확하게 결단하고
정확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오늘 하루,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23-33)
* 오늘의 기도 제목
1. 기독교인들이 분리와 구별의 문제를 정확히 함으로서 세상에서 빛, 소금이 되게
하소서.
2. 새로 오신 성도님들 잘 정착. 바나바 사역 1기 훈련을 위해서. 토요일 오전 9시 30분.
3. 야외예배 및 광복절 연합 행사 및 체육대회. 전도의 기회가 되도록.
(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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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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