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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욥기묵상14]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30:20)–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 하는 이유!
욥은 29장부터 무려 세 장에 걸쳐 자신의 마지막 말을 표현한다. 긴 글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아픔, 논쟁 등을 행한 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관점을 표현한 글이다. 이 글 속에는 욥의 진심이 담겨져 있다. 욥의 속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깊은 속마음이 중요하다. 흔히 무의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의식의 세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0퍼센트만 드러나 보이는 빙산의 밑바닥에는 90퍼센트에 해당하는 물에 잠겨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은 빙산의 실체이다.
깊은 속마음, 무의식의 세계. 이것이 실은 우리의 실체이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이 생겼을 때, 큰 이권의 상황이 생겼을 때, 큰 기쁨의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의 속 마음이 드러난다. 이 속마음이 중요하다.
이 속마음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 자존심 밑바닥이 긁혀져야 드러난다. 내 아픔이 극에 달해서 밑바닥까지 아파 봐야 그 본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그 본심, 그 진심을 원하신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성령으로 인도함 받음으로 그렇게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렇게 하나님과의 진심의 관계를 갖는 것이 참된 구원의 본질적 의미이기에…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구원을 나 중심의 개념, 획득의 개념, 죽고 난 다음에 가게 된다는 시간적 개념, 죽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간다는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구원의 가장 핵심적 관점은 ‘인격적 관계’이다. 이를 ‘언약적 관계’라 한다.
이 관계를 이해하고, 이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다른 신앙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참된 ‘인격적 관계’ ‘언약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를 진심의 신앙 공동체, 즉 참된 교회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는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한 공동체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이를 참된, 바른 전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진심이 담긴 전도이다.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언약 공동체의 지체 만이 가질 수 있는 전도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전도의 대상을 향할 때는 진심으로 향하고, 중간에 대충하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노력한다.
이러한 본심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 욥은 육체적 아픔을 겪었다. 자녀를 잃는 고통을 겪는다. 아내가 자신을 떠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 고난을 겪는다. 친구들이 자신에게 참된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 있는 자아가 참된 믿음의 자아가 아님을 보게 된다. 이 과정은 아프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긴 과정, 긴 기간, 자신의 본심을 제대로 보게 되는 ‘아픈’ 과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욥기는 서론에서 결론으로 곧장 갈 수 있는 책이 아니다. 42장까지의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흔 한 장이라는 과정이 필요했다.
욥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내면이 드러나는 장이 29장부터 31장까지의 세 장이다.
이 세 장 속에는 욥의 치졸한 자아, 옹졸한 자기 중심적 모습이 보여진다. 불편이 나온다. 교만이 나온다. 자기 비하가 나온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아픈 과정 속에 하나 일관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함’이었다. 욥은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하나님을 향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하든, 불만을 토로하든 그 대상인 하나님을 향하는 것에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까지를 우리는 ‘종교’라 한다. 신앙의 관점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도덕’이라 한다. 노력의 관점으로 신세계를 건설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최선의 노력 끝에 욥이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응답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
왜 그런가?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갈 수 있는가? 없다! 가도 만날 수 없다!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고,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다.
하나님을 향하지만, 절대적 선을 향하지만, 궁극적 절대 세계를 향하지만 결코 만날 수 없고, 만들 수 없다.
여기까지 묵상했을 때, 성도라면 떠올라야 할 내용이 무엇일까? 바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죄값을 온전히 치루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을 ‘의롭다’ 하심으로 의인된 자, 즉 중보자를 통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이 걸어서 달나라고 갈 수 없고, 로켓을 타고 가야만 하듯이, 죄인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모습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고, 덧입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 욥이 행했던 고백을 절규해 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고백은 욥의 고백, 우리의 고백, 죄인들의 고백이다. “내가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하늘은 세시간 동안 어둠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의 외면, 하나님의 침묵의 상황이었다.
그 예수께서 완전히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 죄 값을 치루시고, 길을 열으시고, 성령으로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믿는 자들에게 ‘예수의 영’인 성령을 주셨다.
욥기를 이 지점까지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요청하고, 의지하고, 영접하고, 붙잡는 것은 38장부터 나오는 ‘전능자 하나님’을 ‘귀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게 되는 고백’(42:5)을 제대로 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이고, 동의고, 고백이어야 한다.
죄인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도 받아 주지 않으신다. 절규해도 듣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기도는 들어 주신다.
그래서 성도는 길을 보고 가는 자들이 아니라, 길 되시는 예수를 보고 가는 자들이다. 예수님만 앞세우고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만 의지하고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만 붙잡다 보니, 성도의 삶에는 예수님의 모습, 십자가의 모습만 보여 질 수 밖에 없다.
현재 한국에는 로만 카톨릭의 수장 교황의 방문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한가지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황도 한 인간이다. 로만 카톨릭 교도도 인간이다. 개신교 신자도 인간이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을 보면서 예수님만 보여야 한다. 예수님만 의지하기에 예수님만 보일 따름이어야 한다. 사람을 높여서는 안된다. 예수님만 높여야 한다. 선을 행함도, 비판을 행함도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으로만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남을 향하여 지고 가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고, ‘내’가 붙잡고, ‘내’가 앞세우고, ‘내’가 십자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남을 향하여 ‘당신 십자가 졌는가’ ‘당신 십자가 져야지’ 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를 대하고 이해하는 참된,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셨듯이…
지금 이 시대,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성도들이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만 앞세우고, 십자가만 붙잡고 살아가는 ‘십자가적 삶’을 살아감으로 세상에 가장 필요한 향기인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다. 세상은 간절하게 이 향기를 원하고 있다.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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