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28일째 (03/12/토/2016)
[당당합니까?]
[묵상할 말씀] 눅 20:19-26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25)
[묵상]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절실하게 깨달은 구절 중의 하나가 요한 8:32의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대학시절 철학과 교수님으로부터 진리는 두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있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는 ‘freedom from’의 삶을 낳아야 하고, 또 하나는 ‘freedom for’의 삶을 낳아야 참된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진리는 삶이고, 능력입니다. 그래야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말의 정의상 그 자체가 역동적인 것입니다. ‘즉 참되고 바르다’라는 말 속에 ‘삶의 바름’이 있고, ‘삶의 맞음’이 있습니다. ‘바르고 맞음’이 1+1=2라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본질과 실존의 합’이다 라는 말, 즉 맞는 말, 바른 말 속에는 ‘실존’이라는 ‘있음’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음’과 함께 연결되어야 진정한 ‘진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살아있는 것입니다. 역동적인 능력도 없고, 살아있는 생명력도 없고, 올바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론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라는 글자일 따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은 진리에 대한 가장 올바른 정의입니다. 철학적으로도 가장 정확하게 진리에 대해서 표명한 것입니다.
불가지론, 상대주의, 실존주의, 관념철학, 실증주의, 실용주의 등 어떤 철학적 사조라고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으로 ‘freedom from’과 ‘freedom for’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진리를 찾는 바른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조들에 대한 개별적 비판적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오늘 함께 나누는 관점과는 맥락이 완전히 맞는 상황이 아니기에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눌 진리의 진정한 요소들을 살펴보고, 그 기준과 이러한 사조들을 비교해 보면 자연스럽게 비판적 관점을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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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from’의 의미는 ‘~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걱정, 불안, 염려, 부정적 자아상, 교만, 지나친 경쟁의식, 열심을 넘은 욕심, 깨어진 자아,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상처 등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내가 갖고 있는 온갖종류의 아픔과 어려운 의식으로부터의 자유함을 말합니다.
‘freedom for’의 의미는 ‘~를 향한(위한) 자유’를 말합니다. 섬김, 사랑, 희생, 나눔, 봉사, 소망, 전도, 선교, 예배 등 삶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능동적 자세를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능동적 삶의 영역을 기쁨과 감사와 자연스러움과 풍성한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자유의 모습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갖게 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론을 넘은 실천적 모습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 모습입니다.
나에게 이러한 자유함이 있습니까?
반대로, 나에게 참된 자유함이 없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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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부정적인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함’을 배우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진리 앞에 서지 않은 자들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참된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속박과 억눌림, 회피, 도망의 모습만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앞에 서지 않았기에 ‘백성을 두려워합니다’(19). 진리앞에 서고, 진리를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은 그 누구 앞에서든지 당당합니다. 그는 사람앞에 서기 전에, 먼저 진리 앞에 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진리앞에 먼저 서지 않았기에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합니다. 이들은 로마의 휘하에 있는 총독과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공조합니다. 진리에 서 있지 않는 자들은 악과의 공조적 관계를 얼마든지 갖습니다. 즉, 비진리의 집단과 사람들은 언제나 이합집산, 이래 저래 공조와 적대를 손바닥 뒤집듯 합니다.
비진리의 사람들은 유인책, 회유책, 공갈협박, 유도심문 등을 일삼습니다. 약점만을 파고 들려고 합니다. ‘그들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20).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십니다. 진리위에 있으시기에 어떤 회유책, 어떤 유도심문에도 ‘사실’만을 말씀하시기에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섬기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하나님 섬기는 것과 대등한 관계로 예수님을 유도심문합니다. 둘 중에 하나를 얘기했을 때 로마와 여호와 하나님, 둘 중의 하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넘어 뜨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자신들 스스로가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마구잡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한 진리관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보다 높으신 분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권력과 집단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로마 황제가 아무리 높다 할찌라도 하나님 아래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에 로마 황제는 세상에 일시적, 지역적 통치의 직분을 갖습니다. 유대가 로마의 압제와 통치아래 있는 것도 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를 행하는 것,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둘 다를 섬긴다는 말도 아닙니다. 가이사와 하나님은 존재적, 신분적, 능력적 차원에서 동등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와 하나님의 존재적 구분이 되기에, 하나님 궁극적 통치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인 로마 통치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 아래 있음을 인정할 때, 세금을 바치는 것 또한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드러나게 됩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전적 통치, 우주적 통치, 역사의 주관자 되심을 믿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에만 눈이 멀었고, 경쟁 대상이라 여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의도만 갖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신적통치의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세상에서 겪게 되는 정치적 갈등, 민족적 갈등, 집단간의 갈등 등에 대해서 수구적 관점, 이기적 관점, 자기 중심적 관점, 결과적으로 편협적 관점만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적 통치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 자들은 오히려 더 큰 배타적, 대립적, 분파적 관점을 갖게 되고, 그 결과 많은 지역적, 인종적, 국가적, 집단적 갈등과 이기주의를 양산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암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비진리에 입각한 집단 이기주의, 자기 중심적인 분리주의, 배타주의를 향한 강력한 깨달음을 위한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이러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26).
아무… 말을 못합니다….
진리 앞에서 비진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빈(虛, empty)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합니까? 사납게 대합니까? 째려보는 눈빛을 발사 합니까?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표독스럽게 대합니까? 불만으로 대합니까? 불안으로 대합니까? 먼저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시다. 나의 삶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실 때, 즉 내가 진리 위에 있을 때, 나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freedom from)하게 되고, 모든 섬김과 희생을 향해서도 자유(freedom for)하게 됩니다. 나의 말투와 눈빛과 자세는 ‘부드러움을 품은 담대함(당당함)’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인 ‘온유’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열매를 구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