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29일] "교회의 본질과 존재 이유"

by AAHC posted Mar 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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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29일째 (03/14/월/2016)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 이유!] 


[묵상할 말씀] 고전 12:12-13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


[묵상] 

교회로 인해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교회를 보며 많이 실망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개독교’라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비판을 받을 때 겸손하게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 관점에서 교회를 다시 보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삽니다.  그것은 교회를 높이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갖고 있는 역할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신앙인들을 말합니다.  그 말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신 뒤 그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유일한’ 기관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 큰 만큼 존귀한 직분이기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큰 어려움을 주게 되는 직분인 만큼 진지하게, 조심스럽게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신랄하게 비판을 받을 만큼 부족한 상황이라고 교회를 포기해야 할까요?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에 사람이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끝까지 바르게, 개혁하려는 노력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만큼 포기하고 싶은 교회가 어디 있을까요?  분파가 심했고, 성적 타락이 심했고, 세상 법정까지 가는 그런 교회였고, 자기 자랑을 일삼는 교회였고,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는 그런 총체적으로 타락한, 총체적으로 포기하고 싶은 그런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을 그린 ‘고린도 후서’가 쓰이도록 인도함 받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성도는 현대의 교회를 향하여 ‘현대교회 전서’를 써야 합니다.  신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회개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현대 교회는 전서를 넘어 후서를 쓰게 되는’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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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처절하게 타락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교회의 본질을 짧은 두 절을 통해 선포합니다.  짧은 두 절이지만, 실은 교회의 매우 중요한 본질을 얘기하기에 우리는 이 두 구절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다시 확인하고, 더 귀한 마음으로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많이 있겠지만, 최소한 다음의 네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는 말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라는 몸은 그리스도라는 머리 한 분만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머리는 명령의 출발지 입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 성도는 단 한분의 명령, 그 분의 명령만을 민감하게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명령을 무서워해서 안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어떤 것일지만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각 몸의 지체는 머리의 명령만 듣듯이,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명령만 들을 때 교회는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 성도가 되고 맙니다.  물론, 목회자도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 문제 목회자가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의 아버님은 파킨슨씨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파킨슨씨 병의 가장 치명적인 것은 뇌에서 몸으로 전달하는 호르몬이 발생하지 않기에, 뇌의 명령이 몸의 각 지체에게로 전달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말짱하고, 아프지도 않은데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병입니다.  저는 그 병을 보면서 머리와 몸의 연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외적으로는 말짱합니다.  큰 건물, 세련된 프로그램, 아직도 많은 숫자들, 헌금들… 등 등.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명령보다는 세속적 이념, 문화 등에 더 많이 영향을 받지 않는가 싶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영적 파킨슨씨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둘째, 몸은 하나입니다.  즉 교회 안에 여러 지체들이 있지만 모두 한 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구심적적인 측면을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 리틀 램 어린이들이 헌금 특송을 하였습니다.  리틀 램은 아장 아장 겨우 걸음을 걷기 시작하면서 아직 유치원에 가기 전 단계의 어린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헌금 특송을 너무나 예쁘게 하였습니다.  리틀 램 선생님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치원 이상 어린이들은 어린이 찬양대를 만들어서 예배 시간에 찬양도 드리는데, 리틀 램 어린이들도 예배를 섬기고 싶고, 섬길 수 있음을 함께 체험해 보고, 어린이들에게도 그런 예배자임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가 다 한 몸을 이루는 분들입니다.  다 소중합니다.  연령, 인종, 배경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한 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각 지역 교회들도 실은 보편 교회의 각 지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주일에 이웃 교회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동일한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의 기쁨을 누리면서, 과연 하나님은 모든 지역 교회의 하나님이심을 한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지체, 모든 지역 교회들이 전체적으로 한 몸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교회 안에서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가족, 한 몸임을 기억하게 되고, 지역 교회들도 실은 보편 교회의 각 지체임을 생각하면서 ‘한 몸’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한 몸’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된다면… 교회 안에서 어찌 싸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 각 지체의 존재를 존중하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전체가 한 몸이라는 이유로, 각 지체의 개체성을 무시하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자세는 삼가해야 합니다.  

이민교회는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님들의 배경이 너무나도 각자 다릅니다.  언어도 다르고, 세대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심지어는 인종도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나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면 매우 편안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다른 지체들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다른 지체들의 관점을 똑같이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자라는 2세들과 대화할 때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비교적 1세와 2세의 분리적 모습이 많지 않습니다.  어릴 때 부터 예배를 같이 드리고, 청소년이상이 되어도 한 달에 한번은 같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2세들을 만날 때 저는 제가 잘 못하는 영어로 말합니다.  그러면 2세들은 대부분 한글로 저에게 답변합니다.  둘 다 어눌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있음을 서로 느끼면서, 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존중의 자세를 서로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각 지체가 각 지체의 인격성을 생각하면서 대할 때… 교회는 말 그대로 unity in diversity (다양함 가운데 갖게 되는 하나됨)의 참된 의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실은 이 마지막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선교적’(missional)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심도 중요하고, 구심적 교회관(하나됨)도 중요하고, 원심적 교회관(각 지체를 소중하게 여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건강한 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서, 교회안으로만 눈길을 돌린다면… 정말 바보같은 일이고, 교회의 본질을 본질적으로 잊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지하철을 만들어 놓고, 실제 노선에 투입하지 않고, 멋지다고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의 건강성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도대체 세상에 왜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한 인식입니다.  교회는 분명히, 반드시 세상 안에 있어야 하고, 세상을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을 주셨습니다(창 12장).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고,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그런 단계적 개념으로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것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열방에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복 개념을 동시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창세기 12장을 해석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즉, 교회의 존재 이유는 교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교회는 세상에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잘 된 다음 세상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세상을 동시적으로 생각할 때 비로소 교회는 제대로 교회답게 발전하고,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 경상비(운영비, 목회자 사례비, 교육비 등)를 다 정한 다음 나머지로 구제 및 선교비를 책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내적/외적 사역관련 예산을 동시에 짜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 성도가 교회이기에, 성도 개인의 존재 이유는 내가 사는 커뮤니티를 위해서 있다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는 이 땅에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하게 됩니다.

교회는 반드시 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오늘의 적용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 위에 나눈 내용 중 네번째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교회 다음 지역 사회’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보면서 교회로서, 성도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는 늘 그 본질적 목적, 본질적 기능을 잘 못 사용하거나, 잃어 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올바른 묵상의 적용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 지역 신문을 읽으십시오.  지역 사회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지 관심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진정으로 교회이고, 성도라면… 그리스도가 내 삶의 머리 되시고, 우리 교회의 머리 되신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작은 것부터 순종하면 됩니다.  

‘교회 먼저, 지역 사회 그 다음’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라는 사고의 전환 또한 매우 중요한 적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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