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36일] 당당하십니까?

by AAHC posted Mar 2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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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36일째 (03/22/화/2016)

[당당하십니까?]


[묵상할 말씀] 눅 22:54-71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70)


[묵상] 

당당함!  어떤 사람, 어떤 상황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담대하고, 당당한 모습을 갖는 것은 매우 신뢰할 만하고,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반면 비굴하고, 또 겉만 당당한 모습을 갖고, 조금 전만 하더라도 담대했는데, 더 큰 세력 앞에서 금방 비굴해지는 모습을 갖게 된다면 그런 거짓된 당당함은 오히려 더 측은함과 언짢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 앞에서도, 그 어떤 상황앞에서도,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참된 담대함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연약한 계집 종앞에서도 거짓말하는 베드로!  그가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얼마나 당당했겠습니까?  그러나 ‘너도 그 무리의 한 사람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말고의 친척으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몇 시간 전의 당당함 대신에 정반대의 비굴함을 보여 줍니다.

진정한 당당함이 아닌, 감정적, 일시적, 위선적 당당함은 참으로 ‘위험한 당당함’임을 말해 줍니다.

--

반면에 예수님은 참된, 진정한 당당함을 보여 주십니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67)라고 추궁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더 담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67).  참된 당당함은 이론적 설명을 넘어, 확신과 신뢰의 믿음이 있을 때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당당함을 갖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고소하는 근거도 부족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절대적, 신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보호 본능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어떤 이론적 설명을 해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68).  진정한 당당함이 없기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신 것입니다.  

정당한 당당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질문에도 당당하게 답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진리와 진실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질문에 당당함 대신에 당황합니다.  답을 하지 못합니다.  진리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담 뒤에 예수님은 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이제부터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  이 당당한 묘사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묻자(70),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7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굳이 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온 세상 만물이, 그리고 피조물인 너희들이 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고 선포하지 않느냐’라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권적 선포입니다.  

이보다 더 당당한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을 잡으러 온 세력들을 향하여 하나도 당황함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가슴 속이 다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더 시원한 것은 ‘그 만군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을 위하시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간절한 마음이 보여지기에 가슴이 시원한 만큼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주님의 당당함을 보면서 갖게 되는 송구함, 감사함, 고마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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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겸손한 당당함을 가지셨습니다.  우주 만물 위에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을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겸손한 당당함!!!  Humble Nobleness!!!!

성도는 이 세상에서 굴욕적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세를 가져서도 안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처럼 ‘겸손한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고, 타협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그런 성도를 보면서 세상은 참된 신뢰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당당함을 보며 세상적이지 않기에 귀한 매력을 세상에 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그 당당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당당함을 자신 속에 하나님으로 거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는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참된 당당함의 자세를 갖게 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서 끝부분에 비굴함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가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루 세번 기도하는 그 기도 시간을 형식적이 아닌, 참된 진정한 자세로 기도하는 자가 됩니다(행 3장).  그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 뱅이를 향하여 ‘일어나 걸어라’(6) 라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담대한 당당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진정한 당당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그 분으로 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바로 베드로 안에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 속에 주님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속에 ‘주님’으로 계실 때까지 기도합시다.  그 분으로 인한 당당함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어떤 담대함, 당당함도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금방 비굴해 질 수 있는 일시적인 것, 아니면 남을 짓밟게 되는 위험한 교만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현대 사회에는 이 ‘겸손한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타협 많고, 비굴함 많고, 거짓된 모함과 협박, 손바닥 뒤집듯 배반하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쉽게 헤어지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진정한 당당함’을 세상에 보여 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당당함은 교만함이 아닙니다.  당당함은 세력과시가 아닙니다.  당당함은 비굴함이 아닙니다. 당당함은 진리위에 설 때 시작됩니다.  당당함은 우주를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때 부여 됩니다.  당당함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나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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