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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2 03:06
[새벽 묵상-레위기/7] “영화 ‘밀양’ 한 장면에 대한 성경적 대책/대안으로서의 속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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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6:5) – “영화 ‘밀양’ 한 장면에 대한 성경적 대책/대안으로서의 속건제’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이라고 말하면 이미 영화를 본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지 다 알 것이다. 남편도 잃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유괴당한 뒤 너무나 가슴 아프게 죽게 되는 가장 큰 슬픔을 당한 여주인공은 신앙의 힘으로 그 누구도 이기기 힘든 고통을 극복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들의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유괴범으로 부터 들은 그 표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미 용서 받고 평안하다’는 그 말을 아이의 엄마는 들으면서 용서, 화해, 치유, 구원의 본질이 송두리채 사라지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있는 종교(그렇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였다)의 허무를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절망을 넘어 일탈된 행동까지 하게 되는 정신 이상의 상태가 된다.
과연 유괴범은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것일까?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 그가 이해한 용서는 참된 것일까? 그가 가진 것은 신앙일까? 도대체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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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서는 5대 제사를 레위기서의 맨 처음에 놓는다. 그 만큼 제사의 의미는 중요하다. 첫 세 종류의 제사는 많이 드릴 수록 좋은 것이다. 번제, 소제, 화목제는 헌신과 충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등을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에 드리는 기쁨, 받는 기쁨이 있다. 많이, 자주 드려야 하고, 그렇게 할 수록 좋다.
그러나 네번째와 다섯번째인 속죄제와 속건제는 적게 드릴 수록 좋다. 아예 안 드릴 수 있다면 더 좋다. 그것은 죄 짓고 난 다음 죄를 속함 받을 때 드리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제사는 범죄한 다음 드릴 때 따르게 되는 가이드 라인의 성격도 있지만, 실은 이러한 제사 규례를 미리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함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삶을 ‘미리 살아가라는 의미가 실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를 짓고 난 다음의 후속 조치를 위한 규례적 의미도 있지만, 그러한 죄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했을 때, 죄짓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예방책의 의미도 담겨져 있는 것이 레위기서에 나타난 속죄제와 속건제 규례라 할 수 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어떤 제사를 말하는가? 기본적으로,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로, 속건제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짓게 되는 죄를 속할 때 드리는 제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제사는 모두 죄,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상태를 규정한다는 차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재산 혹은 물질을 훔치거나 착취한 경우, 그리고 거짓 맹세로 불로 소득을 했다가 발각난 경우 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갖게된 동기가 바로 속건제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속건제의 경우도 ‘여호와 앞에 잘못을 저질렀다’(5:19),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6:2),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6:7) 등으로 속죄의 근본 동기와 본질적인 해결책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못되었다고, 속건제를 드려야 할 죄를 범했을 때, 그냥 하나님 앞에서만 용서함 받도록 함으로 성경은 해결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속건제를 드려야 할 죄는 분명히 사람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먼저 (악한 동기와 방법으로 착복한) 모든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 보내되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정당하게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단순한 관계 회복을 넘어 풍성한 나눔과 섬김관계로 더 발전하라는 의미로 해당 물건의 오분의 일에 달하는 것을 더해서 돌려 주도록 한다. 성경은 실로 ‘관계’를 중요시 여긴다.
성경은 실로 영혼을 중요시 여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참으로 중요시 여긴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관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삶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영혼에 대한 섬김이 없다면 그러한 사람은 삶의 본질적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썩어 없어져도,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앞에 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넘어 더 풍성한 관계로 회복함을 성경은 속건제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사람과의 관계에 까지 적용하는… 이야 말로 진정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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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은 자기 자녀를 죽인 유괴범을 위해 면회를 간다. 그러나 그 면회 중 유괴범은 자신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자신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여주인공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자, 잘 되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감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유괴범의 이면에는 속건제의 가장 핵심인 자신이 잘못을 범한 대상을 향한 진심의 사죄, 실질적인 용서 구함, 그리고 참된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 등은 전혀 없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신앙(?), 여전히 자신이 인생의 왕이고 하나님은 그 자신의 왕됨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신앙(?)을 이해한… 철저히 신앙을 오해한 모습, 반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철저히 신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앙이 아닌, 자기 도취, 자기 의, 자기 노력, 자기 만족의 철저한 인본적인 종교적 모습만 보여 주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유괴범은 신앙을 오해했고, 하나님을 오해했다.
그러한 반신앙적인 모습은 결코 사람들에게 참된 치유를 주지 못한다. 유괴범에 의해 아들을 잃은 여주인공은 이러한 반신앙적인 모습에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신앙의 이름으로 오히려 독과 상처를 준다. 신앙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좌절케 하고, 짓밟아 버린다.
속건제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없으면 기독교인들이 종교인이 되고, 오히려 세상에 더 큰 상처를 준다. 영화 밀양은 속건제가 없는 기독교를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영화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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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참된 대안을 찾아 보아야 한다. 자존심으로 살고, 자존심으로 죽는 죄성의 인간이 과연 이렇게 실제적으로 자신이 해를 끼친 대상에게 가서 진심으로, 실제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의 과오를 많은 사람들앞에 드러냄으로써 수치와 모멸도 다 받으면서 그렇게 사람앞에 가서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
차라리 속죄제처럼 ‘편하게’(?) 그렇게 하나님께만 회개하고, 사건을 종결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고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지 않을까?
여기서 포인트는 다른 어느 제사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제물’에 그 참된 방법과 원리가 있다.
성경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의 차이가 있음을 말해 준다. 속죄제의 제물은 다양할 수 있다고 성경은 얘기한다. 송아지를 드릴 수 있고, 염소나 양을 드릴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도 가능하다. 심지어 고운 가루로 제물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속죄제물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누구나 해야 하며,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질을 많이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누구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속건제는 어떤 제물을 바쳐야 하는가? 단 한가지 이다. 숫 양으로만 드려야 한다. 상식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죄를 속함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더 큰, 더 값어치있는 제물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짓는 죄는 어쩌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죄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더 작고, 덜 값어치가 있는 제물로도 속함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 못한 죄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면 됨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과연 최고의 제물이 필요할까? 하나님께는 ‘진심과 중심의 마음’이 중요하다. 제물이 없어서 못 드려서도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그 속죄를 받을 수 있도록 제물의 종류를 다양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죄는 반드시 숫양을 드려야 했다. 왜 그런가? 이는 우리가 이런 질문을 솔직하게 함으로 이해하게 된다. 즉, ‘사람앞에서 실제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보상과 배상을 행하는 그런 일들을 해야 하는데… 과연 쉬울까?’
(속죄제, 속건제) 둘 다 어렵고, 둘 다 진정성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적, 실천적인 면에서는 속건제를 드리는 것은 실제 차원에서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이는 사람앞에 가서 잘못을 구하고, 보상과 배상을 행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내면의 어려움, 자존심 상함 등을 생각하면 속건제는 실제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함 받았다는 것으로 때우려 한다… 영화 밀양에서처럼…)
그래서 어린양의 속건제물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그 십자가의 힘을 얻는 것만이 유일하게 이 속건제를 진심으로, 용기있게, 진정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 예수님은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 지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신을 섬김의 도구로 드리셨다. 자신을 완전히 죽이신 분이셨다.
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는 내가 잘못 범한 사람 앞에 가서 무릎을 꿇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멸시천대하고, 조롱하고, 핍박해도 그 사람 앞에 가서 용서를 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보다 훨씬 더 큰 조롱과 핍박도 받지 않으셨는가?
그 예수님의 사랑과 도우심과 힘을 의지할 때, 속건제의 한 과정인 (내가 잘 못 행한 대상인) 사람 앞에 가서 진심과 진실과 진정으로 용서를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드리게 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때 이미 속건제의 향기는 하늘로 올라 가게 되는 것이다.
속건제가 오늘날 그 의미대로 바르게 성도들에 의해서 드려지게 된다면… 참된 화목이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으로, 이 사회 속에, 모든 관계 속에, 공동체 속에 이룩되리라 믿는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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