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학부 철학 전공자의 조그마한 넋두리…)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라고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낯설기에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새롭게 생각하다 보니, 더 깊은 이해와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현대 실존주의의 관점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이미 알고 있다거나, 너무 익숙해서 더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게 되면 더 깊은 사고나 깨달음을 갖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관점은 삶에서 생각의 무게, 논리추론의 무게를 더 해 줘서 일견 도움이 된다고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더 깊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렇게 생각을 의심하며, 끝없이 의심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더 의심해야 한다.
왜?
낯선 것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의심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하는 존재’가 과연 존재의 최종 지점인지를 생각/의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현대 철학의 많은 인식 중심, 실존중심, 경험 중심, 논리 중심, 그로 인한 논리 실증주의, 분석철학 등의 끝이 결국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상대주의, 회의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그로 인한 인본주의/이기주의/현세주의를 낳게 된 것이 아닌가?
인식이 존재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그 끝자락이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앎의 끝자락인가에 대한
집요한 성찰이 있다면, 생각(논리와 이성)의 무게는 무겁고 중요하지만, 그 생각(논리와 이성)의 무게가 존재의 무게와 동격이 될 수 없음 또한 집요하게 생각할 때… 비로소 생각의 절대화, 논리의 절대화라는 잘못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된다.
데카르트 이후 경험과 논리를 절대화한 가장 큰 맹점은 ‘생각하는 존재’에 ‘존재의 최종지점’을 두었다는 데에 있다. ‘생각하는 존재’가 존재의 최종지점이 아니라는 생각(의심)을 할 때, 비로소 근현대 인식 중심의 철학에 기반한 제반 철학적 자세의 맹점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의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라는 표현 대신에,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존재에 대한 경이감과 이성이 시작된다’라고 ‘존재의 실존적 측면’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측면’ 또한 함께 얘기했다면 현대의 인본주의적 자세는 어느 정도 그 방향이 바뀌어 지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표현 대신에 ‘나는 생각하면서 또한 의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관점을 가졌다면 근대철학의 전체 방향이 바뀌지 않았을까라는 웃픈 생각을 해 본다. (데카르트의 전후 역사적, 철학사적 과정과 상황을 볼 때 나의 표현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런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도 정면 도전(철학하는, philosophieren)하는 것이 진정한 철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산수(수학)의 ‘1+1=2’라는 가장 기본 공식과 같은 철학의 가장 기본 공식인 ‘존재(being)는 본질(essence)과 실존(existence)의 합’이라는 쌩기본을 어느 순간 잊어버린 철학사의 탈궤도화한 비극을 몸서리치게 체험하며 살아가는 한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슬프고 아픈 가슴으로 넋두리를 늘어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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