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왜 이토록 신랄하게 표현 하였을까요?
그것은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 때문입니다.
6절에서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은 헬라어로 ‘hetero’입니다. ‘헤테로’라는 표현은 두개 중에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는 둘 중의 하나가 ‘절대적’으로 참 혹은 거짓이라는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에게 서로 자기 아기라고 두 여인이 아기 한명을 데리고 왔을 때 그 아기의 친모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한 여인이 친모이면, 다른 여인은 가짜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이구요. 즉, 친모와 아기의 관계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관계가 계속되어야 하는 ‘절대성’을 포함한 상황입니다.
마치 죽음 뒤에 영원한 삶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이듯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듯이, 그리고 죄인됨을 인정하는 죄인이든지, 아니면 죄를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든지….
둘 중의 어느 쪽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다른(헤테로)’ 복음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7절에서도 ‘다른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다른’은 allon 으로서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다른 다수와 차별이 있는 하나의 상황’을 말할 때 ‘알론’을 사용합니다.
이는 복음의 유일성을 표현한 말입니다. 절대성이나 유일성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절대성은 그 존재와 선택에 있어서도 ‘절대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차원에서 비장한 마음 자세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이고, ‘알론’은 아무리 다수가 있어도, 그리고 그 다수가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 할찌라도 유일한 길, 생명의 길은 그 길 하나 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이해되는 표현입니다.
마치 이 세상에 종교가 많지만,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길, 그래서 유일한 입장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에서 미국을 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삶을 사는 길은 여러가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유일한 길 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가 열심히 개척해서 복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개척해 놓은 갈라디아의 교회들의 성도님들에게 이 복음의 절대적 측면도 약화시키고, 복음의 유일한 측면도 약화 시켜 버린 상황을 보니 바울로서는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6).
복음은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과는 완전히 다른 유일한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타협이나 혼합적 자세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은 변질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복음에 대한 자세가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두 번씩이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편지 서두 부터 강력하게 썼던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나는 복음대로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매일 성경 묵상: 갈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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