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하지 말고, 오직 한 길로만 가라! (왕하 3:1-12)
1.
요한 계시록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라고 말하고 있다. 애매하거나 미지근한 신앙 생활은 올바른 신앙 생활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자 혹은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의 길은 다음의 세가지 길이 있다. Yes 혹은 No 그리고 ‘아디아포라’의 영역이다. 아디아포라 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 결정하여도 큰 문제가 없는 영역을 말한다. 교회 카펫 색깔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혜롭게 결정할 문제이다. 이것을 진리의 문제로, Yes or No의 문제로 생각하고 접근하게 되면 이는 올바르지 못한 자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닌 영역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교회와 성도는 유일한 길, 성경적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삶의 매 순간 선택에 의해서 삶은 전진 혹은 정체, 우회, 심지어는 후진의 길로도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선택은 삶의 진정한 능력인 것이다.
2.
북쪽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은 아하시야였다. 그는 어느날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어 죽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왕이 아하시야의 동생 여호람이었다. 여호람은 북 이스라엘을 12년간 다스린 왕이었다(1). 그리 오래 다스린 편은 아니다.
여호람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성도로서 선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반면교사로 배우게 된다. 즉, 그는 미지근한 선택의 삶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부친 아합의 잘못을 모두 다 따라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애 버린 것이다(2). 이는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지 않았다. 적당하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 대해서는 떠나지 않고 계속 행했던 것이다.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 10지파를 자신의 영역안에 계속 두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종교정책을 통한 정치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레위 지파들 대신에 일반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레위 지파가 행하는 사역을 맡김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연의 질서를 어겼다. 제사 절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꿈으로서 백성들이 절기마다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종교를 통한 정치, 외교적 정책을 행했던 인물이었다.
여로보암이 행한 가장 악한 일 중의 하나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일개 금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우중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금송아지를 외적인 하나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마치 아론이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고 있는 동안 백성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로 인해 백성들은 모두 그 황당한 지도력에 미혹된 것과 같은 상황으로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하나님 비슷한 것’에 더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다. 인간은 보는 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이 크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쉽게 교회 건물의 큰 것,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의 모임 등에 사람들은 쉽게 영향 받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현상 등에 마음이 더 가기 마련이다. 이러한 외적인 현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 할찌라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외적인 것에 쉽게 영향 받을 수 있는 약함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쁜 의도로 이러한 외적인 것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로보암이 그랬고, 여호람이 그랬다. 그는 부친 아합이 잘못한 바알의 주상 들은 없앴다. 그러나 그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언제나 남쪽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을 그리워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릴 그 무엇이 필요했고, 그것은 벧엘과 단에 세워둔 금 송아지 형상이었다. 그것은 없애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섬겼고, 그로 인한 신앙은 부분적인 신앙이기에 언제나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이 아닌 셈이었다.
3.
아합 왕이 죽자 그동안 충실하게 많은 가축으로 조공으로 바쳤던 모압이 배신하게 된다. 이에 여호람은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연합군을 만들어 모압과 전쟁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이에 여호사밧은 응하게 된다. 왜?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사돈 지간이기 때문이다.
여호람의 아버지인 아합은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한다. 그들에게서 난 딸이 아달랴이다. 그리고 이 아달랴는 남쪽 왕 여호사밧의 아들과 정략 결혼하게 된다. 왜 북쪽과 남쪽이 사돈을 맺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연히 정략적 결혼 정책 때문이다. 결혼의 신성함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니 그 속에는 자기 나라만을 위하는 이기주의가 가장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이었다.
순수하지 못한 것은 언제나 후유증이 있게 마련이다. 여호사밧은 여호람의 연합군 제의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옆 나라이면서, 자신보다 열등한 나라였던 에돔을 향하여 같이 연합군에 가입하기를 요청한다. 모압을 치기 위해서는 에돔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돔은 자신보다 강대한 유대가 요청해 왔을 때, 거절하지 못하고 응답하게 된다. 여기에도 순수함의 모습은 없다. 약육강식의 타락한 세상적 외교술만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정당한가? 결혼 정책부터 하나님의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전쟁을 위한 동맹 또한 이기적인 동기가 그 기저에 깔려 있었다.
결국 이러한 세속적 동맹은 언젠가 깨어 지고, 배신을 화약고처럼 안고 있는 불안한 동맹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실제로 이 3개국 동맹의 모습은 완전한 승리, 즉 모압을 온전히 치지 못하고, 중도에 해체되고 만다(27).
4.
이러한 신앙의 회색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3개국 동맹은 자신들이 믿었던 전쟁에서 물을 얻지 못하여 낭패를 당하고 만다(9). 이 3개국 동맹군은 7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한다. 전쟁 중의 군사들이 물이 없다면 이는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 되고 만다.
이러한 어려움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데서 오게 된, 예견된 실패였다.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삶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낭패의 와중에 남쪽 유다왕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을 ‘이제사’ 찾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를 그는 찾았고, 엘리사를 찾게 된다(11-12).
늦어도 바른 길을 들어서게 되면 그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의 유일한 ‘정로’이다. 어느 순간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라는 길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 길 외에는 길이 없고, 길처럼 보여도 길이 아니다. One Way이고, The Way이다.
신앙인에게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아닌 영역에는 모두가 타협이나 제2, 제 3의 대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에 의한 길만을 묻고, 생각하고, 순종함으로 걸어가는 그런 참된 뜨거운(헌신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좁은 길이 될 수 있다. 오해나 핍박의 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그러나 그 길이 ‘그 길(THE WAY)’이라면 우리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오늘 새아침 묵상: 왕하 3:1-12 / 다음 3:13-27)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