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9일째

 

[“텍스트로 하여금 올바른 묵상으로 인도함 받도록 하라!!! ㅠㅠㅠ” – 병고침을 행하신 상황 이면에 담긴 예수님의 넓고 깊은 의도 이해하기!]

 

(오늘 제목은 월터 브루그만의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 책 제목의 패러디임을 밝혀 둡니다.)

 

[묵상할 말씀] 눅 13:10-21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8, 21)

 

 

[묵상]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상황만 보고 묵상하게 되면 단편적 묵상, 나 중심적 묵상이 되기 쉽습니다.  나의 식견, 선입견, 경험 등을 중심으로 성경을 계속 보게 되면, 

 

첫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치명적 잘못을 범하기 쉽고, 

둘째, 성경 묵상이 언제나 나의 틀과 수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얕은 묵상에 머물기가 쉬우며, 

셋째, 결국 성경의 참 능력과 맛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묵상생활(즉, 실제 신앙생활로 연결되는 삶)을 오래하지 못하고, 쉽게 신앙생활마저도 자기 한계에 빠지게 됩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설교자들을 향하여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텍스트가 묵상을 인도하도록 하라!’라고 저도 외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고 병을 앓고 있었던 한 여인을 위하여 (여인이 병 낫기를 간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안식일의 병고치는 행위로 인해 예수님은 회당장의 분노를 사게 되고,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 선포하심으로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겨 주십니다.

 

이 본문만 보았을 때는 작게는 병고쳐 주시는 예수님, 그로 인한 병 고침의 소망과 감사 등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 즉 병이 고쳐지고, 치유가 일어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의 회복이 예수님의 중요한 의도라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를 보통 본문을 보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읽어야 되고, 그렇게 읽게 될 때 하나님의 원래 의도, 예수님의 더 넓고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넓고 깊은 뜻을 깨닫게 될 때, 신앙생활은 역동적, 확장적, 실제적, 생명적 삶으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집요하게, 진지하게, 엄중하게 본문이 말하는 바를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이럴 때 본문의 작은 단위와 또 다른 작은 단위를 연결하는 ‘접속사’ 등을 면밀히 살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18년된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메시지를 끝내신 것이 아니라, 18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앞의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본질적 의도를 말씀해 주십니다.

 

즉, 18절부터 21절까지 나타나는 두가지 비유(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를 묵상하지 않고서는 결코 허리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던 여인의 병을 안식일에 고쳐주신 예수님의 참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18-21절의 두 비유를 묵상하지 않으면, 마치 식당에 가서 애피타이저와 정식 요리를 시켜 놓은 뒤, 애피타이저만 먹고 정식 요리는 먹지 않고 식당을 나온 것과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 두가지 비유, 즉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함께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두 비유를 잘 묵상해 보면, 그 전하고져 하시는 의도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같은 내용의 다른 두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반복이고, 반복은 강조를 의도하며, 강조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두 비유를 함께 살펴 봄으로 18년된 여인의 병을 안식일에 고치신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중요하게 여기게 되며, 진지하게 삶에 적용하게 됩니다.

 

이러한 엄중한 자세로 두 비유를 함께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저의 개인적 묵상 차원도 들어감을 말씀 드리면서… ^ ^)

 

첫째, 겨자씨나 누룩은 공통적으로 ‘작다’는 것입니다.  외견상으로도 작고, 숫자적으로도 ‘겨자씨 한 알’ 양을 표현할 수 없는 ‘그냥 누룩’으로 표현된 적은 양을 말합니다.  적고, 작다는 것은 보잘 것 없음 혹은 성공적 결과를 위해서는 별로 소망이나 가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인기 많음,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 대형화의 바람 등에 의해 이룩되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대중은 우중’이라는 말이 있듯이, 죄성이 있는 인간에 의해서 대중화 된 것, 다수화 된 것, 인기있는 것으로 된 것 속에는 인간의 이기적 관점, 자기 중심적 관점, 경쟁구도에서 승리하고져 하는 승리주의적 관점, 결과에 연연하는 결과위주의 관점이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물론, 그렇다고 다수가 다 나쁘고, 소수가 다 좋거나 맞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의 길은 ‘넓은 길’일 가능성이 크고, 하나님 나라의 길은 ‘좁은 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사역의 길은 결코 다수, 대중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목표는 ‘생육하고 번성’이었지만, 그 다수를 위하고, 향하는 예수님의 길은 ‘좁은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5천명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통해 공급 받고, 그 다음날도 떡과 생선 먹으러 사람들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숫자를 컷 오프 하십니다.  제대로 이해하는 제자 12명만 추려서 다시 훈련과 사역의 길을 다니십니다.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어 버렸을 때, 그 한마리를 찾아 나머지 99마리를 버려두고(?) 찾아 나섭니다.  이는 99마리가 소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는 ‘한 마리’가 1/100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수님께는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떡과 육신의 생선을 찾으러 나온 수천명의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된 영적 진리를 깨달은 사람(실은 그 사람이 소수이든 다수이든 상관없음, 그러나 다수가 아닐 가능성이 많음.  죄성으로 가득찬 세상을 볼 때..)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 한 알’과 양을 잴 필요도 없을 만큼 작은 양이라 할 수 있는 ‘그냥 누룩’의 의미입니다.

 

둘째,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는 생명력, 역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작은 것이지만, 그 속에 생명과 역동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겨자씨는 눈꼽만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나중에 나무가 되고, 나중에 5미터의 크기로 자라게 되며, 나중에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됩니다.

 

누룩 또한 작아서 양의 측정 표현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할 수 있는 역동적 힘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신앙은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이론이 아닙니다.  철학적 진리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합니다.  자유는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유는 생명력을 말합니다.  성경은 영생을 말합니다.  생명의 계속됨, 생명의 현재 진행형을 말합니다.  

 

셋째,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는 공통적으로 그 결과가 ‘풍성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5미터 정도되는 나무로 성장해서 어른이 가지에 올라설 수 있는 만큼 크게 됩니다.  새들도 깃들이게 됩니다.  누룩 또한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할 만큼 풍성함을 줍니다.

 

그러나 외적 풍성함만을 생각한다면 올바른 의미 파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풍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부자라도 재산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면 진정한 의미의 부자가 아닙니다.  워렌 버핏 등과 같은 최고의 부자들이 돈 많은 것으로 칭송 받기 보다는, 최선의 나눔이 있기에 더 칭송받는 것을 보면서 ‘풍성함’의 진정한 의미를 일견 엿볼수 있게 됩니다.

 

겨자씨나 누룩은 그 결과가 외적 풍성함을 가져 옵니다.  그러나 겨자나무로 커졌을 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겨자씨들이 들어 있겠습니까?  가루 서 말로 부풀려진 빵은 그냥 있습니까?  그 빵은 사람들에게 나눠 지는 참된 풍성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풍성함은 이처럼 ‘크고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넷째,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고 보입니다.  그것은 겨자씨도, 누룩도 그냥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땅 속에 파묻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기가 썩어 없어져야 합니다.  누룩도 가루 속으로 들어가 자기는 ‘죽어 없어지고’ 가루를 부풀리게 만드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풍성한 결과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과정이고 자세입니다.  ‘감(going)’이 없으면 ‘됨(becoming)’이 없음을 말합니다.

 

--

 

자, 이제 이러한 두 비유의 기본적 의미를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된 병을 갖고 있는 여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의도와 연결시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십자가’ ‘제자훈련(전 인류를 위해 고작 12명…)이라는 가장 작고, 적은, 보잘것 없는 ‘좁은 길’을 택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산 소망,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 십자가에서 주신 참된 ‘풍성함’을 갖고 계셨고, 풍성하게 나눠 주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분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채움’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 기도 하신 후 자신을 잡으러 온 로마 군인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라고 풍성함에서 나온 자신감의 표현을 선포하시며 십자가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 나아 가셨습니다.  참으로 풍성함의 극치를 보여 주시는 모습입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기도하셨고, 섬기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모두 ‘동사형’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사셨던’ ‘행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현재진행적으로) 간구 하시고 계시는’ 중이십니다(롬 8:34).

 

--

 

자, 이 긴 글을 지금까지 읽으셨다면… 읽으심에 감사 드리고, 수고 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구요… 그리고 저도 타이핑을 오래 하다 보니 손가락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네요… ㅎㅎㅎ

 

그러나 이제 오늘 묵상의 진정한 결론으로 우리가 함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병고침은 단순한 병 고침이나, 안식일 회복 운동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지금은 한 여인의 병고침과 같이 작은 것이지만, 실은 이는 치유를 넘어, 안식일 회복을 넘어, (하나님이) 십자가 죽음이라는 풍성함을 넘어, 영원한 안식,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차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행해야 할 묵상의 적용은…

1) 작게는 소원을 구하고, 치유를 구하는 우리의 간구 기도가

2) 매 주일 맞이하는 주일(안식일)의 의미와 예배를 임하는 자세가

3) 매일이 ‘주의 날’이라는 차원에서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의 바램과 자세가…

 

참된 풍성함을 갖고 있는 ‘영원하고 풍성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생명의 씨앗이 바로 나의 오늘의 ‘믿음의 한 행동’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앙적 삶의 매 순간이 얼마나 큰 가능성과 얼마나 큰 감격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을 기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성함의 결과가 바로 나의 매 순간의

‘감’(겨자씨가 땅 속으로,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으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삶의 현장으로 ‘한 알의 밀알’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감!’ – 이 한 단어로 충분한 적용 표현이 되리라 믿습니다!

 

 

 


목회칼럼

Pastoral Column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30 [목양칼럼] 전진, 또 전진-2026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Forward, and Forward Again 2025.12.30 213
229 [목양 칼럼] 하나님께 '쉼'을 드리는 교회 2025.09.04 286
228 [목양칼럼 Pastor's Column] 국민 성숙도의 중요성 The Importance of Citizens’ Maturity (Korean & English) 2025.06.11 623
227 목양칼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고전 3:16) 2025.05.14 352
226 목양칼럼: '기독교인이 정치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 Pastoral Column: The Attitude Christians Should Have Toward Politics 2025.05.05 623
225 [사순절 묵상/19일째] 가장 소중한 금은? 2025.03.26 441
224 [사순절 묵상/18일째] 내적 치유를 넘어...전인 치유를 넘어...전인 무장으로! 2025.03.26 407
223 [사순절 묵상 / 17일째] Who is your real President? 2025.03.24 487
222 [사순절 묵상/16일째]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2025.03.22 423
221 [사순절 묵상/15일째] 세가지 '끝까지...' 2025.03.22 399
220 [사순절 묵상 / 14일째]탕자의 비유입니까?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입니까? 2025.03.22 375
219 [사순절 묵상/13일째] "찾을 때까지..." 2025.03.19 379
218 [사순절 묵상/12일째] 당신은 제자입니까? 2025.03.18 391
217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11일째 "당신은 천국 잔치를 오늘, 지금 즐기고 있는가?" 2025.03.17 372
216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10일째 "오해하지 말아야 할 좁은 문의 의미" 2025.03.16 314
»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9일째 (2025년 3월 14일) 2025.03.14 344
214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8일째 (2025년 3월 13일) 2025.03.14 358
213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7일째 (2025년 3월 12일) 2025.03.12 348
212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6일째 (2025년 3월 11일) 2025.03.11 436
211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5일째 (2025년 3월 10일) 2025.03.10 375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 12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