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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11일째 "당신은 천국 잔치를 오늘, 지금 즐기고 있는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11일째
[왜 그들은 그 좋은 천국 잔치 초청을 거절했을까? - 당신은 천국 잔치를 오늘, 지금 즐기고 있는가?]
[묵상할 말씀] 눅 14:15-24
"청컨대 나를 양해 하도록 하라…”(18) – 이는 가장 슬픈 변명입니다….
[묵상]
잔치! 누구나 좋아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온갖 맛있는 것, 온갖 즐거운 것이 가득찬 곳이 잔치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해서 저는 참으로 좋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저희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아뭏든 ‘잔치’라는 의미가 갖는 신나고, 기쁘고, 즐겁고, 풍성한 의미가 가득찬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이것은 여담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국수이고요… 그 국수 중에도 ‘잔치 국수’를 매우 좋아합니다. ‘국수’라서 좋고, 그 위에 더 ‘잔치’라서 좋습니다. ‘잔치 국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고, 신납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제가 ‘잔치 국수’만 생각해도 신나는 것보다 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신나고, 즐겁고, 멋진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잔치’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 측면도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라는 말씀을 통해 ‘현재적’ 측면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사순절 기간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면서 ‘하나님 나라, 잔치’를 말씀하시듯이, 우리의 삶에도 부활의 소망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순절 기간이 될 때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을 ‘오늘’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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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면서, 잔치의 초청 대상에 대해서 먼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잔치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권이 있는, 즉 초청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초청의 대상은 공정합니다. 성 안에 있는 일반 사람들이든, 성 안에 있으면서 가난하거나 몸 불편하거나 맹인되었거나 저는 자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차별 혹은 소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든, 길과 산울타리(즉 성 밖의 지역, 이방인들을 의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든 모두 초대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천국 잔치 입니다.
굳이 신학적으로 따지자면, 정통 개혁 보수적 측면에서는 예지예정설에 입각하고, 제한구원설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만을 위해서 이 하나님 나라가 예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더라고, 적어도 그 택하신 자들이 ‘누구’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우리는 모르기에, 최소한 종(신앙인)이 가져야 할 전도와 선교의 대상은 결코 누구를 제외시킨다거나, 어떤 계층 혹은 민족/부족을 덜 구원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영역일 수 있지만, 선택의 대상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 제약해서는 안되기에, 우리는 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전도 및 선교 대상을 제약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세를 늘 가져야 합니다. 잔치의 초대 대상은 민족, 계층, 배경 등 모든 외적 조건을 뛰어 넘어 모든 사람에게 향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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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치는 ‘큰’ 잔치이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으며(16), ‘모든 것’이 준비된 상황이고(17), 자리가 많이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22). 천국을 ‘좁은 문’ 말씀과 결부하여, 규모가 소규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가 쉬운데, 성경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풍성’ 그 자체라는 것이 바르게 예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곳인데, 잔치국수를 먹을 수 있는 진짜 좋은 곳인데(^^), 왜 사람들은 가지 않는 것일까요? 달리 말하면, 천국이 현재적으로도 우리에게 이미 임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오늘, 현재, 지금 그 천국의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며 사는 것일까요?
이를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열려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소유가 있는 사람들은 거절한 것이고,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은 연약하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외적 조건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잔치 초청에 대한 거절의 내면 의식의 흐름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1차 초청된 사람들은 전부 종들에 의해서 행해진 2차 초청에 다 거절합니다. 그들의 거절 사유는 그럴 듯 합니다. 밭을 샀기에, 소 다섯 겨리를 샀기에, 장가 들었기에…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잔치를 거절할 결정적인 사유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밭은 잔치 참석한 다음에 얼마든지 관리해도 되고, 소도 1-2일 정도 걸리는 잔치 자리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르고, 관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결혼의 경우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당시 결혼하면 군대도 1년 면제 될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 속에는 내가 처한 상황,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 자신이 생각할 때는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이 내면 속에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밭은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농사의 특성상 1-2일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됩니다. 소 다섯 겨리(10마리)는 조금 더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한끼를 안 먹이면 문제가 되고, 또 실제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소인지를 시험하는데에는 시간의 관점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의 경우는 밭이나 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우선순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은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것, 우리에게 처한 어떤 상황 등이 삶을 볼 때 그리 크게 나쁜 것이 아닌 좋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적당한 기쁨과 기대가 있는 상황입니다. 밭도 샀고, 소도 샀고, 결혼도 한 그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러한 내가 갖고 있는, 내가 처한, 기대되고, 긴장되고, 뭔가 거기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그 무엇으로 인해서… 내가 정작 누려야 할 ‘잔치’를 못 참석하고, 못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입니다(밭, 소, 결혼). 그러나 그 어떤 것이라도 ‘천국 잔치’의 풍성함과 중요함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의 실제 삶은 나의 그 ‘작은 것’에 나의 눈과 마음이 가기에,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에 내 눈길이 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없기에’,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고, 초청에 쉽게 응할 수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가난했다고 초청받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갖고 있었던 내면의 ‘자기를 다 내려 놓은 상태’가 있었기에 초청에 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이 말은 외적 가난함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자신을 내려 놓음이 있을 때 그 시각이 자신에게서 잔치에로 향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제, 정작 중요한 것은 천국의 현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나의 현재적 삶이 천국의 풍성함을 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삶이 과연 천국의 풍성함을 오늘,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지요?
못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천국 잔치를 배설해 놓고, 초대한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천국을 보지 못하는 나의 깊은 내면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내가 볼 때 나에게 좋은 어떤 것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과 율법을 지킨다는 자긍심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성공을 향한 열망, 더 멋지게 살고 싶다는 나의 기대,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박한 꿈, 이번 학기에는 더 좋은 성적을 받고 싶다는 나의 노력,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을 잘 돌보고, 회사에서도 성실하게 노력하여 승진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들… 실은 이 모든 것이 다 좋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러한 마음들로 인하여, 분주하거나, 내 눈길에 그 곳에만 머물게 되기에 정작 봐야 할 하나님의 풍성함과 임재와 영광의 함께 하심을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그 분과 동행하지 못하고, 지금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면서… 내가 갖고 있는 어느 정도의 좋은 것 때문에… 약간의 기대감과 설레임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노력하는 삶의 치열함 때문에…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실제 삶에서는 내 삶의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았기에… 우리는 잔치 석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삶을 실은 오늘도, 현재적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인가? 잔치에 초대를 받았지만, ‘승낙’하지 않았기에, 잔치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식당 밖의 사람입니다. 잔치 자리 밖의 사람입니다. 안에서는 온갖 기쁨과 풍성과 행복이 넘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그 자리 밖에 있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그 잔치의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내 눈 앞에 있는 조금 좋게 보이는 그것에 집착하느라, ‘청컨대 나를 양해 하도록 하라’라고 하면서 절대적 풍성함을 손 앞에서 놓아버리는 안타까운, 바보같은, 크게 후회할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청컨대 나를 양해 하도록 하라…”(18) 이는 가장 슬픈 변명입니다….
불참석의 변명대신에, (초청에) 응함으로 잔치의 풍성함을 누리는 ‘매일’ ‘오늘’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눈 앞의 작은 좋은 것 때문에, 하늘의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을 못보지 않도록, 못 누리지 않도록… 실은 눈 앞의 좋은 것이 앞을 제대로 못보게 만드는 ‘영적 눈꼽(!)’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영적 눈꼽이 끼지 않았나 살펴 보고, 끼었으면 떼어내기를 원합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떼어 낼 때, 제대로 보게 되듯이, 영적 눈꼽을 떼어 낼 때, 천국 잔치의 풍성함을 보게 되고, 초청에 응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천국 잔치의 풍성함을 오늘, 지금 누리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은 being입니다. 천국 잔치의 being을 현재적으로 누릴 때, 복의 통로가 되는 doing & serving 이 이룩되리라 생각합니다.
눈꼽이 끼어 있지 않았나 ‘늘’ 살펴 봅시다… 영적 눈꼽!
(영적 눈꼽은 삶의 매 순간, 여러 상황 속에서 나도 모르게 너무나 쉽게 끼일 수 있는 것임을 늘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목회칼럼
Pastoral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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