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사도행전 7] 나는 어떤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가? (행 4:1-31)

by AAHC posted Aug 25,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나는 어떤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는가? (행 4:13-31)


1. 나의 의문-왜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하는가?

복음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좋은 소식’(good news)이다.  좋은 소식을 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이 부분이 언제나 고민거리였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 전하는 자도 좋고, 전달 받는 사람들도 좋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 중에는 이 좋은 소식 듣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는 것일까?  왜 좋은 소식을 거부하는 것일까?


2. 기득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본문을 보면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된다.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들(경비대장), 사두개인들(1), 관리들,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과 알렉산더, 대제사장의 문중(5-6), 세상의 군왕들, 관리들(26),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 이스라엘 백성들(27) 등이 본문에서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고,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영역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종교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기득권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상황에서 로마로부터 정치적 지위를 부여 받은 자들, 로마 관리 및 군인들은 또 다른 기득권 계층의 사람들을 말한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구별되게 하는 또 다른 의미의 기득권적인 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는 내용이다.  구원을 전파한다는 것은 구원의 반대, 즉 죽음과 영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구원의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지금 죽음 가운데 있소, 당신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썩어 없어질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들이요’라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이 선포는 이미 기득권, 즉 삶의 기쁨과 의미를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안 좋은 소식, 나쁜 소식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고, 의지하고 있는 그것을 부정하고, 버리라고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진정 그러한 것들이 참된 구원을 주는가?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기득권이 자신들에게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 한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 과부 등은 비교적 복음을 쉽게 받아 들이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는가?  그것은 이미 ‘무엇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참된 구원을 줄 수 없음을 인정하라는 말은 이미 갖고 있는 그 무엇을 부정하라는 말이다.  그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부인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 기득권이 그렇게 만만하게, 쉽게 내 버릴 만큼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찮은 것인가?  그 기득권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것을 부인하라니…  그것을 부정하라니…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능력, 배경, 재능 등에 대해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3. 더 심각한 문제는 기존의 신자들이 ‘기득권’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문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나눠야 하지만, 더 심각하게는 기존의 신자들과 나눠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즉, 또 다른 문제는 이미 자신의 삶이 죄인이고, 타락했으며, 영생의 삶을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 ‘성도’들이 어느 순간 복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나는 이 문제 또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복음으로 시작했지만, ‘종교 생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구원을 은혜로 받았지만, 그 받은 구원 이후의 삶을 은혜로 계속 바라 보지 못하고, 어느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으로 보기 때문이다.  새 생명으로 (은혜로) 태어 났지만, 아직도 젖만 먹여야 살아가는 육적 삶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지도자의 직분을 기득권으로 보게 된다면…  교회 건물을 기득권으로 보게 된다면…  교회의 성장을 기득권으로 보게 된다면…  그것을 잃게 되는 것을 좋아 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계속 갖고 있으려고 하고, 누리려고 하고, 과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존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절망’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저토록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기독교 신앙을 가질 이유를 잘 찾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기득권이 죄의 산물이고, 결코 그 기득권이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구원 받은 이후에도 계속 죄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할 것이며, 그래야 계속 ‘구원’에 대해서 갈급한 심령이 될 것이다.  계속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때, 참된 감격에 빠질 것이다. 

한번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계속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  조난당한 사람이 구명용 줄을 한 번 붙잡았다고 해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붙잡은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온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성도는 ‘계속 성도’가 되어야, 하나님은 계속 그 성도의 삶에 ‘하나님’이 되신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성장을 넘어 성숙으로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 


4. 왜 베드로는 그렇게 모든 사람 앞에서 담대했을까?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세상의 그 어떤 기득권자 앞에서도 당당히,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담대히’라는 표현과 그와 동일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13, 20, 29, 31).  사도들의 이러한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이 계속해서 ‘복음적’ 생각과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만약,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도직, 초대교회의 부흥을 ‘기득권’으로 생각했더라면, 이들은 적당히 신앙을 타협하거나, 변질시키거나, 왜곡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성령께서 계속해서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 들이도록 격려하심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제자 훈련 받을 때 수없이 반복된 자신들의 기득권 주장이 결코 온전한 것이 아님을 그들은 체험했었다.

베드로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의 인도하심 따라 고기를 두 배 가득히 잡게 되었다.  그의 실패(기득권 부정)는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에로 인도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배와 부친을 버려두는 기득권 부정의 삶에로 들어선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받게 된 칭찬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칭찬과 명예로, 즉 기득권으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기득권 의존의 자세를 철저하게 무너뜨리신다.  ‘사단아 물러가라!’라고.

물 위를 걷는 순간, 베드로는 ‘나도 걸을 수 있구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자신의 기득권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 순간 그는 물에 빠지고 말았다.  베드로가 기득권을 의지하려고만 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여지없이 (인생의) 물에 빠뜨리시는 훈련을 철저하게 시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상황이 될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단언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자존심, 의지력 이라는 자신의 기득권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 번 부인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이라는 것이 결코 자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인도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기득권 부인하는 법에 대해서 너무나도 처절하게, 철저하게 배우게 된다.  그런 베드로였기에,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칭찬이나, 능력도 자신이 의지하거나, 자신이 높이는 기득권으로 삼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루에 3천명이나 구원받는 놀랄만한 사건이 일어나도, 그는 여전히 성전에 기도하러 간다.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귀한 성도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것을 버릴 때, 기득권을 기득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해야 할 유일한, 영원한 ‘기득권’으로 인정할 때, 그 누구 앞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올바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기득권은 어떤 것인가?  [앤아버 소망 교회 / 새벽 기도회 / 2011년 8월 24일, 수요일]


(앤아버 소망교회 / www.aahope.net / 배헌석 목사 / pastorbae@gmail.com / twitter:@hunsukbae / hunsukbae.blogspot.com)


Articles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