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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앤아버 소망 교회에서 선교 후원하고 있고
현재 필리핀에서 신학교 선교 사역을 하시고 계시는 (조직신학)
차재승 교수님께서 소망 교회
2010년 "기도하는 교회/기도하는 가정/기도하는 성도"에 맞는
기도에 관한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실하고, 능력있는 신앙생활에 귀한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차재승 교수_기도글.doc
(전문 보기)
기도란 무엇인가? (1) 영적인 교제 (2) 감사와 참회 (3) 간구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 속으로 들어가며 우리의 속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멈추고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인해 지치고 병들고 가난하고 죽게 된 우리는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순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깊은 안식으로 들어갑니다.
기도는 오직 은총으로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도 없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바랄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인간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은총을 이해하고 경험하고 믿는 자들은 밀려오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고백을 멈출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벅찬 감격과 기쁨의 순간입니다.
이 기쁨의 순간에 우리는 또한 우리를 만납니다.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나를 만납니다. 우리의 의(義)가 누더기와 같으며 우리의 죄가 바람처럼 우리를 몰아가는 것을 비로소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사64:6). 하나님 앞에 선 우리는 우리를 주체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견딜 수 없고, 우리를 용서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참회의 순간보다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는 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피와 살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넘치는 샘물을 퍼 올리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구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행3:6). 그러나 우리 주님께 있는 것으로, 교회를 세우고, PTS, 하늘맘, Westhill, 더배섬, 기아대책, 다일을 세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주님께 있는 것으로, 다형이와 수연이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지혜와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사랑을 갖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 주님께 있는 것으로, 빠라나께의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2009년 7월 26일
칼빈의 기도론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기도의 본질 (III.20.1)
1.1. 은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1.2. 전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것을 구한다
1.3. 은밀한 철학: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의 보물을 구한다.
2. 기도의 4가지 법칙 (III.20.4-14)
2.1. 기도에 합당한 정신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1)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
에 합당하게 자신을 초월해서 순결한 마음 (2)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 이상을 구하지 말아야 (3) 기도의 교사인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
2.2. 강렬한 필요성으로 기도해야 한다-(1)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가
증스러운 것 (2) 주리고 목마를 때 더 하나님을 찾게 된다 (3)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난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
2.3. 겸손하게 기도하라-(1) 죄의 고백과 용서가 기도의 시작-죄를 슬퍼하
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2) 하나님의 종들
은 거룩하여질수록 겸손한 고백의 기도를 드렸다
2.4. 확신으로 기도하라-(1) 기도에는 두려움과 확신이 공존한다 (2) 그러
나 회개는 믿음과 굳게 결합되어 있다-기도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
로 얻는 것이다 (3)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순종보다 앞선다.
3. 기도의 필요성과 관련한 6가지 권고 (III.20.3)
3.1.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소원이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해야.
3.2. 부끄러운 욕망이 침입하지 않도록 우리의 속마음을 토로해야.
3.3. 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진정한 기도.
3.4. 응답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명상해야.
3.5. 기도로 얻게 되는 것을 기쁨으로 받기 위해서.
3.6.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과 습관으로 확인하는 것. 2009년 8월 2일
예수님과 기도-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기도하셨다!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1. 주기도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마6장): (1) 외식하는 기도를 하
지 말라-5절 (cf.외식으로 길게 기도 하는 서기관을 삼가하라-막12:40) (2)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6절 (3) 중언 부언하지 말라-7절 (4)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8절 (4) 따라서 이렇게 기도하라-주기도문
1.2. 구하라: (1)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눅12:31 (2)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
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7-11 (3)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1.3. 항상 기도하라: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눅18:1 (2) 불의한 재판관에 게 찾아가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비유-눅18:2-8 (3) 종말에 대해서 가르치면
서,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1.4. 용서/회개/겸손: (1)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너희를 용서하리라-막11:25 (2) 자기를 스스로 의롭 다 하는 바리새인과 회개하는 겸손한 세리의 기도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9-14.
1.5. 시험/능력/종말: (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
하라,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26:41, 막14:38) (2) 기도는 귀신을
쫓는다!-제자들이 귀신 쫓는 능력을 달라고 하자 기도 외에는 이런 유 (귀 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3) 종말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
라-막13:18
2. 예수님의 기도와 기도하시는 모습
2.1. 아버지께: (1)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눅23:34 (2) 내 영혼을 아 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눅23:46 (3)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 이까-막15:34 (4) 이것을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 타내심을 감사하나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 이 그들에게 계시해주기를 원하는 자들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나이 다-눅10:21-22 (5)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요17 장 (6)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22:42.
2.2. 기도하시는 모습: (1)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됨,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으로 -눅9:29 (2) 저희를 떠나 무릎을 꿇고-눅22:41, (cf.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 려-마26:39) (3)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에 밤새도록-눅6:12 (4) 한적한 곳에서 -눅5:16 (5) 기도하시고 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심-눅11:1 (6)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눅22:44
2009년 8월 9일
기도와 겸손
한국교회를 전체로 묶어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저러한 특징들을 열거하며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가운데 하나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총과 한국교회의 무시무시한 열정으로 기독교 역사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을 우리는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정이 때로는 교만을 낳기도 합니다. 열정이 교만이 되어버리면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뿔을 가진 심장 없는 괴물이 됩니다. 따라서,우리의 열정은 최고의 장점이 되기도 하면서 가장 무서운 적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의 여러 기독교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가 대체적으로 좀 오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필리핀을 찾는 교회지도자들이 왜 하필 “예전에는 한국이 필리핀처럼 가난했는데 지금은 세계에서 11번째로 잘사는 나라가 됐다”는 허망한 낭설을 퍼뜨리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일단 잘 산다는 것이 복음과 그리 긴밀한 연관이 없을 뿐더러 세계에 잘사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11번째라니…(1인당 GNP로 따지면 우린 아직 30위권 밖에 머무르는 그저 중상위권 정도의 나라일 뿐입니다). 눈빛과 몸짓과 언어와 행동에서 자신들의 성공에 도취한 뿔난 기독교인들을 만난다는 것이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닙니다.
오만한 목회자, 오만한 교회, 오만한 신학자, 오만한 선교사, 오만한 기독교 정치가, 오만한 기독교사회운동가, 오만한 성도들 때문에 교회가 사회로부터, 선교지의 현지인들로부터 간혹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오만한 인간은 사회를 더럽히지만 오만한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오염시킵니다. 영혼이 안식해야할 하나님의 처소에 인간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만이 바로 죄의 가장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기독교는 희생과 자기부인, 죽기까지 낮아지신 바로 그 분을 고백하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겸손입니다.
4세기의 위대한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겸손이 기독교철학의 토대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웅변가의 원칙은 연설을 어떻게 전달하는가하는 점에 있다면 기독교인의 원칙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인간이여 자신을 낮추어라! 오 힘없는 이성(reason)이여 침묵하라! 바보 같은 자연이여 하나님을 들어라!”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를 안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겸손한 자라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라야 그 속 사람까지 겸손할 수 있습니다. 2009년 8월 16일
잡념, 침묵, 그리고 기도
4세기 초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해지자 탄압받던 기독교는 어느새 권력과 결탁해서 급속도로 부패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잡한 세속을 떠나서 주로 이집트의 사막지역에서 명상과 기도로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이들을 지도한 자들을 사막교부라고 부른다.
고요한 사막의 움막 켈리온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기도했던 수도생활에서조차 그들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했던 것은 명상과 기도 중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잡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잡념 없는 내적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그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소유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을 택하기도 했고, 소란스런 말과 행위로부터 벗어나 침묵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던져놓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재에 들어가기를 갈망했다.
언어를 통한 기도는 언어가 기도를 지배하며, 침묵하는 기도는 잡념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잡념과 기도는 결코 함께 섞여서는 안 되는 절대모순이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가운데도 상대방의 흩어진 마음과 시선은 우리 가슴에 못을 박는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에 잡념이라니…
어떤 사막교부는 침묵하기 위해서 3년간 입 속에 자갈3개를 넣고 다녔다. 말을 멈추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다. 금식기도의 최고의 매력가운데 하나도 1주일쯤 지나면 말할 기력을 상실해서 갑자기 점잖은 인간이 된다는 점이다. 침묵은 나를 멈추고 세상과 사람을 비로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침묵은 나의 외면의 소리를 멈추고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침묵은 언어가 하나님을 담아내지 못할 때 가슴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막교부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순수한 침묵에 이르게 되면 나의 내면의 소리도 멈추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조차 멈추게 되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간격도 생기지 않는 신비스러운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가...끊임없이 소음을 만들어 내면서도 끊임없이 소음 때문에 죽겠다고 하는 우리 같은 민초들에겐 가슴에 담기는커녕 머리에 넣기도 벅찬 얘기다.
기도하는 가운데, 혹 입은 침묵해도 머리는 요란하다. 혹 머리가 텅 비어도 분노와 불평으로 가슴이 출렁인다. 침묵기도, 명상기도, 내면기도, 관상기도 등 그 어떤 참신한 기도를 드려도 우리가 결코 잊지 않아야 될 것은 기도란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불쌍하고 불쌍한 내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고백하며 용서와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100분간의 침묵으로도 내 속에 내가 그득하다면 그저 kyrie Eleison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을 외치는 짤막한 탄식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도일 수 있다. 주여 잡념에 빠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눅17:13)
2009년 8월 23일
속박, 자유, 그리고 기도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대 심문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부분은 문학가들만이 아니라 철학자 , 신학자들이 사색하며 인용하기를 즐기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자유보다는 기적, 신비, 권위를 선호하는 인간에게 예수님은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을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대 심문관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빵과 신비에 헌납하는 것인가? 혹은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라는 이론은 우아하기 그지 없는데 우리의 실재는 빵과 기적에 가까운 누더기가 아닌가? ‘기도할 때 우리는 자유한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 엄청난 주제를 곁눈질 해보자.
속박 1-간혹 기도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를 허접하게 하면 우리의 신앙상태를 의심한다. 기름진 언어에 길들여지면 투박함 속에 담긴 애절함을 조악함으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하나님과 만나는 그 순간에도 인간들이 아우성이다.
속박 2-’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어떻게 하면 응답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양한 기법이 쏟아져 나온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만남이라는 순전한 동기가 기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슬슬 옮겨가기 시작하면 기도를 잘 해야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왜, 언제, 어디서, 누가 기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은 기자들이 좋아하는 사건보고다. 그러나 기도는 잘 보고해야 하는 사건이 아니다.
속박 3-잘하는 기도에 대한 집착은 짧고 찐한 기도에 대한 그리움을 낳았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예수님도 질책하지 않으셨던가! 그러나 기도의 양이 때로는 기도의 질을 좌우하기도 한다. 오래 기도해야 중보기도의 진미를 경험할 수 있다. 언젠가 아주 먼 친척이 갑자기 전화해서 마치 늘 나를 만나는 듯이 얘기해서 놀란 적이 있다. 그 분이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해 온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가 아니라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라는 것이 기도의 전부이다. 우리의 관심을 ‘누구에게 기도하는가’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기도에 관한 기술, 근심,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기도야말로 인간의 기적, 신비,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속하는 자유를 누리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잘 누리기보다는 늘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 인간의 불행은 기도조차 인간의 틀 속에 가둘 때 발생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허허로움이 기도의 가장 신비한 매력이다. 2009년 8월 30일
역설과 기도
기도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말하려면 하나님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 문제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그런 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서양세계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함께 존재하면 역설이라고 하지만 동양세계에서는 하나와 여러 개가 동시적인 것을 자연이라고 부른다. 도교는 특히 이런 인생과 우주의 역설적인 깊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도덕경에 의하면,
導沖而用之久不盈 (도경 4장)-도는 비어있어서 아무리 사용해도 채워지지 않는다-’가장 충만한 것은 빈 것이다,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는 역설.
明道若昧 進道若退...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덕경 41장)-밝은 도는 어두운 것과 같고 앞선 도는 후퇴한 것과 같고...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 지고 큰 소리는 소리가 희미하며 큰 모양은 형상이 없다.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덕경 45장)-말 잘하는 것은 어눌한 것과 같고 조급하게 바쁘면 추위를 이길 수 있으며 고요하면 열기를 이길 수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역설을 비켜갈 수 없다. 죽음이 있어야만 현재의 삶은 의미 있게 유지된다. 만약 우리가 영생한다면 지금을 귀하게 생각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주와 과학도 역설적이다. 만약 우주에 아무런 질서가 없다면 과학이 발견할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주에 질서로만 가득 차있다면 질서는 인간을 결정해버리고 과학은 쓸모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국, 과학적인 발견을 위해서 우주는 질서와 무질서가 함께 있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역설 그 자체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우리의 역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역설을 견딜 수 없어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와 기도로 만나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하나님의 참으심과 겸허함은 끝도 없다. 2009년 9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