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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묵상/12일째] 당신은 제자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12일째
[당신은 제자입니까?]
[묵상할 말씀] 눅 14:25-35
"소금이 좋은 것이나…”(34)
[묵상]
1.
성경을 읽을 때 본문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묵상은 쉽지 않습니다. 묵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실은 우리의 삶은 영적으로 인도함 받기 보다는, 나의 육적인 욕심과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 인도함 받게 됩니다.
따라서 저의 개인 신앙 경험과 목회 경험을 토대로 볼 때 말씀(특히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관찰/해석/묵상/적용’이라는 성경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라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없이 ‘관찰’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실은 ‘관찰’에 전체 시간과 에너지의 70-80퍼센트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찰이 제대로 될 때, 실은 성령님을 의지하며 행하는 관찰이기에 그 가운데 이미 ‘해석과 묵상’의 부분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묵상과 적용’은 짧은 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그 말씀을 곱씹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이기에 ‘하루 종일’이라고 표현함이 맞습니다. 이것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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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본문은 처음에 보면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 하시고, 망대 세우는 비유와 전쟁하는 비유는 해석이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갑자기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실 때 정말로 이런 연결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이런 상황속에서 갑자기 유명한 ‘소금 구절’이 나옵니다(34). 그리고 본문은 저주에 가까운 독설로 끝맺습니다(35).
각 그룹의 내용들이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어렵고,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받아 들이기도 어렵고, 또 각각의 의미들을 전체적으로 연결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큐티를 그냥 쉽게 할 경우 (이러한 본문을 대하게 되면) 제대로 행하는 큐티는 초반에 포기해 버리고, 대충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묵상하고, 적용하기가 쉽습니다. 본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큐티’가 되기 쉽고, 그러다 보면 ‘말씀 자체가 주는 능력’을 받지 못하기에 말씀이 삶에 제대로 역동적으로 역사하지 않게 됩니다.
껍데기만 뒤집어 쓴 꼴이 됩니다. 뿌리가 내려지지 않은 신앙생활은 금방 말라버리거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금방 뽑혀 버립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수십년 하면 자신도 지쳐 버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도 하나님의 능력, 살아계심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말씀으로’ ‘말씀이 말씀하고져 하는 그 말씀’을 우리는 받도록, 가장 우선적으로 ‘관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핵심은 어떤 것일까요? 분명히 25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라고 하시면서 말문을 여신 것이 35절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한 단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5-35절을 한 단락으로 보고, 하나의 의미 그룹임을 생각하면서 각 의미를 살펴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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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본 초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가지 말씀을 하시지만, 실은 예수님의 기본 초점은 말씀하시는 시작 초반에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5). 이 표현을 그냥 넘어 가면 안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turning to them)’라는 표현 속에 예수님의 매우 중요한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무리’(crowd)는 ‘다수’입니다. 다수는 결코 제대로 개인적 파악이 어렵습니다. 선포를 해도 전달이 되는지 파악이 되기 어렵습니다. 전달은 되어도 그것이 삶에 적용되는지를 도와주는 ‘양육’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대중’ ‘다수’의 유혹에 교회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많으면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는 올바른 전략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는 몸만 돌이키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방향에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다수가 할 수 없고, 소수로만 파악 및 훈련이 가능한 것, 바로 ‘제자’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초점은 ‘제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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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제자의 모습 혹은 정체성에 대해서 주님은 몇가지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자신의 부모, 아내, 자식, 형제 등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26). 이 부분은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문자적으로 미워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보다 더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적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합니다(27).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구절을 통해 예수님 믿기 때문에 가족도 버리고, 집안 살림도 안하고, 자녀들도 돌보지 않으면서 사역한다고 열심히 행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내가 져야 할 ‘나의 십자가’는 제일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인 가정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십자가’입니다.
가족을 정말로 사랑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할 때… 즉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 인격적 관계, 동행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십자가의 능력, 풍성함, 감사, 감격 등을 충만히 갖게 되고, 그로 인해 가족을 바르게, 진심으로, 풍성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두가지 저 자신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제 힘으로 저의 가족을 사랑하려고 할 때 한계가 있음을 정말로 깨닫게 됨을 고백합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저의 힘으로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부족하고,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힐 때 저의 본성, 저의 분노, 저의 서러움, 저의 무능력이 나오게 됨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갖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서가 아니고서는 결코 제가 저의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또 하나는, ‘저의 십자가’의 가장 우선적인 영역은 저의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하는 입장을 변명하듯이 앞세우면서 가족, 아내와 자녀들, 부모님께 대한 저의 시간 할당, 정성을 드림, 마음을 다해서 질적 시간을 갖는 등을 하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의 십자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저도 어느 순간 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목회라는 사역으로 인해, 잘못된 열심은 욕심임을 스스로 돌아보지 않을 때, ‘저의 십자가’를 내팽개치게 되는 모습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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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망대를 세우기 전에 정확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든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정확하게 전망을 해야 한다는 두가지 비유는 실은 동일한 의미라 생각합니다.
제자의 삶을 아무 생각없이,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만큼 진지하게 해야 하는 영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실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이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진지하게 생각하시고, 실천하셨는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진지함 만큼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어떤 진지함 없이… 성경을 읽을 때도 진지함 없이… 기도를 할 때도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
제자는 삶의 매 순간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삶입니다. 영적 생명이 제자 한 사람의 삶에 의해서 세상에 보여 지기도 하고, 못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냥 지적 진지함만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과연 그런가 하고 따져 보는 베뢰아 성도님들의 말씀에 대한 진지함, ‘평안’이 올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진지함,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내가 함부로 영혼에 대한 마지막 판단을 하지 않는 전도의 진지함…
그 진지함 중에서 클라이맥스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이 바로 3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in the same way) 라고 하신 표현은 그 앞의 내용들을 다 받아서, 이제 더 중요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실 것의 서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클라이맥스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
이를 문자적으로 자신의 현 모든 재산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 버리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면서 속으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단편적, 속물적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나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말씀으로 이끌림을 받을 때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점검 사항은 바로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져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 때 참된 자유함입니다.
물질은 나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율 배반적인 자세입니다. 나는 물질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물질로 부터 자유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전적 요구 혹은 차용 등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청지기적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물질 뿐만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또 맡겨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도 ‘주인’의 자세가 아니라, ‘청지기’의 자세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이는 참된 제자, 즉 주님만이 주인(Lordship)이라는 제자의 자세,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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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제 오늘 본문의 끝 부분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처음 본문을 읽어 보았을 때는 각 부분이 다 연결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주님께서는 1) 주님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며, 3) 진지한 제자의 길을 늘 생각하고 살아가고, 4) 참된 Lordship과 청지기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삶…. 이 삶이 바로….
“소금”이라는 사실입니다(34). 이러한 소금은 ‘정말로 좋은 소금’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소금은 좋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표현은 곧 ‘참된 제자 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의 의미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본문을 여기까지 묵상하면서 약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흔히 ‘소금 = 성도 (혹은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금=제자’로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가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찌를 다시 한번 더 조금은 깊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앞으로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다음 표현은 저를 더 머리카락 하나까지 치솟게, 소름돋게 만들었습니다….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짜게 하리요…’(34).
제자가 제자답지 못하면, 제자가 교회안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세상은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망합니다. 소금을! 진짜 소금을!
교회는 참된 제자의 의미를 가르쳐야 하고, 참된 제자 사역을 행해야 합니다. 형식을 넘어서, 실제적으로… 제자된 사람만이 사도가 되어서 속사도를 만들듯이,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제자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20기까지(20여년을 의미) 행해왔는데, 최근에 그 이름, 즉 제자훈련이라는 이름 대신에 ‘집중훈련’이라고 바꾸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자 훈련반에 들어온 사람만 제자가 된다는 오해를 버리게 하고, 전 성도님들이 다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목회의 목표임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디 가더라도, 다수를 행하기가 어려워서 교회 외적 숫자가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의 본질적 목표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를 양성하는데 있음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정립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이키시면서’ 주신 말씀임을 기억할 때, 우리 또한 ‘돌이켜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맛을 제대로 갖는 소금이 되어가는 단계의 첫 걸음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돌이킴’이 없다면… 교회는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려지는 가장 처참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내버려져서 사람들의 발길에 교회가 짓밟히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35)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나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나는 제자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제자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묵상의 적용’을 흔히 ‘행동’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오늘은 ‘주님께 제자됨을 물어 보는 기도’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은 ‘기도’가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행하게 되는 ‘적용’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기도는 반드시 역사(working) 합니다!
목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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