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147.111) 조회 수 1047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 (요이 1:7-13)

1.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하여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7).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철저하게 잘못된 신앙관이라고 질책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성육신(incarnation)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주후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임을 선언하기 까지, 이러한 결론을 갖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수많은 논쟁과 기도, 그리고 수많은 박해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육신을 온전하게 정립함으로서 교회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 참다운 선교의 기초를 닦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이 좀 우스운 일 같기도 합니다.  굳이 전지 전능하신 분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되실 필요가 있으실까요?  그냥 인간이 되지 않고서도 구원을 하실 수 있지 않으셨을까요?  또한 한계와 죄의 부조리를 갖고 있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는 것 자체가 절대적 신 개념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는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 진리와 사랑이 동반된 진실된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성육신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2.
성육신은 그 의미가 넓고 깊습니다.  중요한 것만 살펴 보아도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육신은 바로 진정한 사랑, 즉 상대방 중심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랑은 남 중심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존중하고,  상대방의 눈높이, 문화에 맞추는 것을 참다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구원받았는지도 모를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구원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에 입각한 구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언어(love language)라고 있듯이, 참다운 사랑은 나의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노진준 목사님께서 설명하신 부분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금식 기도를 마치자 마자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 첫번째 시험이 바로 돌을 명하여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시험은 얼핏 보기에 정당한 시험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39일째 금식을 그치고 빵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하였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금식 기간을 마친 다음에 빵 먹으라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요구했던 것은 빵을 먹으라는 것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예수님의 신적 신분, 신적 능력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예수님의 자발적 성육신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예수님은 온전하게 이해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아픔과 어려움을 진실로 이해하는 참다운 상대방 중심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의 아픔을 내 가슴으로 함께 아파하고, 그 사람의 어려움을 온전하게 내가 진실하게 겪으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그 뒤에도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배 위에서 주무실 정도로 인간의 육적 한계 속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목마르셨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배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할 때 조차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인간의 아픔을 가슴으로 진실하게 느끼시기 위해서. 이것이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의미입니다. 

둘째, 성육신은 전인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인간됨이라는 본질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아있는 실존적인 존재입니다.  영으로만 된 존재가 아니라, 육과 혼을 다 갖고 있는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육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인간을 전인적으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게 되면 영적인 존재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존재로 가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미디어가 발달 됨으로 인해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병원이나 선교 현장과 같은 특별한 경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지만, 몸이 가지 않고, 함께 모이지 않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 목회자가 직접 현장에서 함께 호흡하지 않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는 전인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성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점검해 볼 수 있는 영역이라 보입니다. 

셋째, 성육신은 자발적인 겸손의 표현입니다.  이를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낮아 지셨습니다.  겸손은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놀라운 능력, 지위, 신분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신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로 낮아져서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높이게 되는 그런 자세를 말합니다.  매일 꼴등을 하는 사람이 남을 위해서 자신의 성적을 겸손하게 낮추어선 ‘나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자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즉 성도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왕자요 공주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성육신을 온전하게 깨달았다면 성도는 가장 겸손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으로 낮아져서 이 세상 사람들을 평균케 해야 합니다.

넷째, 성육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노라”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 본체의 형상”(히 1:3)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과 비슷한 분이 아닙니다.  상징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사에서 아리우스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비슷한 본성(homoiousios)을 가진 존재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homoousios)을 가진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두가지 라틴어의 표현은 ‘i’라는 단 하나의 철자가 있고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으며, 삼위일체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성육신,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역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대교나 이슬람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한 선지자로 본다면, 이들은 성육신의 개념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본성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신앙의 핵심 내용중의 하나입니다.

다섯째, 성육신은 실천이었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명사형이 곧 동사형이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행동으로 보여 지기 전까지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랑을 인간으로 되시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를 우리는 순종이라 합니다.  성육신의 개념을 온전하게 이해한 성도는 실천, 즉 순종을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여깁니다.

3.
성육신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 보아도, 신앙생활, 인간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원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육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온전한 자세가 아닙니다.  이 성육신의 원리들을 사도 요한이 깨달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한이서 1:12)

사도 요한은 성육신의 원리를 깨달았기에 편하게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말로만, 글로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가서 보기를 원했습니다.  왜?  상대방 중심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함으로서 상대방의 기쁨을 충만케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실로 사도 요한은 성육신의 중요성을 바르게 깨달은 자였습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등경 아래에 두면 그 근처 부분만 밝게 빛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생각 됩니다.  교회만 너무 밝고, 세상은 너무 어두워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일 수 있지만, 신앙생활이 교회생활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교회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 일상생활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오래 다닐수록 교회 생활의 시간양은 더 많아 지는데, 신앙생활, 즉 삶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은 상대적으로 더 줄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회는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 상담 문의: 배헌석 목사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