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로마서 묵상 4] 믿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롬 4:13-25)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롬 4:13-25)
1
족보는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입지, 자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족보를 만드는 법과 하나님께서 족보를 만드는 법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조상(선조)에 의해서 나의 족보가 결정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의 후손에 의해서 나의 족보가 결정됩니다. 내가 무슨 무슨 김씨 몇 대 손이면 나는 그 가문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조상이 배경 좋고, 권세를 가진 당대의 유명한 사람이면 후손인 나 또한 덩달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족보는 누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영생의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의 영적 조상, 믿음의 조상이 되고, 따라서 후손에 의해서 믿음의 선조 또한 하늘 나라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보아스와 결혼해서 낳은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으므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룻은 자신의 조상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신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세상 족보로 따지면 갈대아 우르 출신에, 우상을 만드는 집안의 자녀여서 결코 성경에 이름이 올라갈 집안도 아니고, 그의 출신 배경으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전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신들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로 존경하면서 등장하는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다가 포기하고, 다시 읽다가 포기하게 만드는 그 유명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신약성경에서 맨 첫 이름으로 거명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2.
어떻게 하면 이런 영적 족보를 만들어 가고, 발전시켜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 하나의 기준으로 기록, 발전됩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영적 족보를 만드는데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일까요? 도대체 믿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믿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 아닌 것,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이 믿음에 반대되는 것을 ‘율법에 속한 자’로 표현합니다. 율법에 속했다는 뜻은 자신의 노력, 힘, 능력 ‘만’ 의지하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능력이 왜 나쁩니까? 노력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물론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동기로 노력하고, 노력하는 자기 자신을 의지, 과시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분명히 죄성을 가진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노력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노력’만’ 의지하고 과시하는 것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노력’만’ 행할 때, 사람의 생각으로’만’ 행할 때 잘 안 되면 사람들은 쉽게 좌절합니다. 작심삼일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능력이 매우 한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속담입니다. 또 반대로 일정 기간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좋다면 이는 실은 더 위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쉽게 인간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너질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크리스챤들은 노력을 하지 말고 기도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두 가지 요건이 갖추어 져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포기입니다. 죄성을 가졌기에 쉽게 좌절할 수 있고, 쉽게 교만해 질 수 있는 그런 죄인 되는 자아를 부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렇게 자아를 부정하는 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이 나옵니다. 믿음은 믿는 자기 자신을 좋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겉치레만 있는 신앙심을 넘어서 문화적 요소만 갖게 되면 기독교의 생명은 자칫 없어지게 되고, 기독교적 행세를 하는 것이 멋지고, 가치있고, 좋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외적 겉치레를 즐기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 속으로 파고드는 진정한 삶의 체현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껍데기만 있게 되면 믿음의 본질이 그렇게 왜곡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대상이 철저하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질서, 법칙 등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의 자세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가장 큰 예수님 동상이 벼락에 맞아서 불탔다는 기사를 잠깐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상이 어떻게 벼락 맞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벼락 치는 날에 동상처럼 예리하거나, 우뚝 서 있거나, 뾰족한 것은 당연히 벼락맞기가 더욱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예수님 동상 위에 피뢰침을 꼽는 것이 비신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적인 행위입니다. 당시 예수님 동상에 피뢰침을 꼽지 않았다거나, 그 피뢰침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질서, 자연 현상의 지극히 정상적인 한 모습일 따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질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학생이 공부 하지 않고, ‘시험 성적 잘 받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몸으로 표현하는 신앙 행위, 기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앙인은 공부의 결과로 자신의 영원한 삶에 영향 받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공부 자체를 즐깁니다. 즐겁게 과정을 즐깁니다. 왜? 이미 결과는 영생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값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목숨이기에 자신의 남은 생애를 가장 귀중하게, 최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부지런합니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질서만 믿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우리 눈에 보기에는 기적처럼 보이는 일들도 있습니다. 놀라운 일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은 그러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내가 내 생각과 계산으로 걸러 내지 않고 그대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갖도록 아브라함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인간의 생각, 계획 등의 영역들을 다 막으셨습니다. 자신의 생활 근거와 기반이 되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하란에서 아버지를 잃습니다. 자신의 형님도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갈 바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나오게 되는 ‘계획’마저도 하나님은 다 막으셨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자식이 없는 자신의 가업을 조카 롯이 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롯은 눈에 보이는 육적 풍성함의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늙은 종을 자신의 기업을 잇는 후손이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라고 정확하게 규정해 주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을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 노력 등을 하나님은 다 막으셨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끊어 버리셨습니다. 심지어는 아내 사래가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있는 나이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이제는 100살이 되어서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상황도 다 지나가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기게 된 자녀가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살아있는 신앙 교본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 났을 때부터, 이삭을 매일 보고, 기르면서 ‘믿음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청소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을 이제 정식으로 하게 됩니다. 믿음은 시험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믿음은 행함이기에,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기에 이렇게 믿음은 이론을 넘어 시험을 통해서 검증될 수 있고, 검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거뜬히 통과합니다. 그 이전에 그렇게 믿음 대신 자신의 노력, 생각으로 모든 삶을 개척하려고 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 시험을 잘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100살에 낳은 이삭을 보면서 ‘믿음이라 이런 것이구나’, ‘믿음은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이구나’ 등과 같은 믿음에 대한 온전한 배움을 계속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와 아브라함의 거리를 많이 두게 됩니다. 먼 조상의 얘기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주 위대한 존재로 만들고, 위대한 신앙의 조상으로 만들어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만들어 버림으로, 우리 자신이 신앙생활하면서 믿음없이 살아가는 모습들에 대해서 합리화하기도 하고, 변명거리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도 분명히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신앙인에게 말하는 정직한 도전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23-24).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라고 명령하신 대상은 아브라함에게만이 아닙니다. 바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선조라고, 우리는 단순히 후손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신앙의 선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그 자체로 신앙의 모범이 되는 신앙의 선조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믿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은 눈에 보이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 소망의 약속이 있는데, 나의 여건 때문에, 상황 때문에 내가 포기하고 있는 영역이 있지는 않으신지요?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영혼이 구원 받고 성숙할 때까지 계속 중보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섬기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안 변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포기하지는 않았는지요?
믿음은 최선과 인내라는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심으로 하나님 나라 족보에 기록되는 신앙의 명가(명문가정)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 첨부파일 '1' |
|---|
새벽 Q.T.
Dawn Q.T.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