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로마서 묵상 6]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롬 7:1-13)
1.
죄!
단 한 글자로 표현되지만, 인류 전체에게 가장 치명타를 던져 준 것!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하면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라는 답을 가장 많이 듣게 됩니다. 반대로 “어떻게 교회를 나오시게 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요”라고 답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도의 경건한 삶은 전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성도이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을 때, 전도의 문은 막히게 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받은 그 구원의 삶은 분명히 죄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을 쓸 때는 이미 4-6장을 지나온 상황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상황을 바울이 이미 신앙 고백을 한 뒤의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죄를 이기는 삶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물론 성도라고 완벽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면 신앙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2.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기고,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까지 가질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을 가슴에 와 닿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결혼 관계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일단 제가 이해한 것으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 음란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생각도, 행동도 음란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결혼을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음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자신을 정죄하거나, 나쁘다고 공식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기 전의 일반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어느 정도 잘 못 했다고 생각은 할 수 있고, 또 마음에 주저함도 있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이 여자를 처벌하지는 못합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정죄할 남편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여김을 받지 않을 따름이지, 분명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있게 됨은 당연한 말이겠죠. 그러한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가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발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중동 상황에서는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돌 맞아 죽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공식적으로 판결 받는 것이고, 그 대가는 죽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너무 은혜로 구원 받으니까 죄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대신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신 것은 알지만, 자신은 피 한 방울 안 흘렸기 때문에 어쩌면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것도 돌에 맞아 죽는 것과 같은 아픔, 치욕, 슬픔, 괴로움 입니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죽음이라는 참혹함을 낳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죄의 결과를 정확하게, 뼈저리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결혼 관계 중 부정하다가 드러나서(발각되어서) 돌 맞아 죽게 된 음란한 여인으로 성도의 죄값, 죄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이러한 죄의 엄청난 무서움, 참혹함에 대해서 너무 쉽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강단에서 죄를 이렇게 엄청나게 두려운 것으로, 나쁜 것으로 그렇게 설명하고 선포하고 있나요? 생각해 보세요.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앞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어요. 그것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 같으면 눈 뿐만 아니라,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 질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내가 그런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데, 나의 배우자가 나를 보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 심정이 어떨까? 죽음 아니겠습니까? 또 주게 되는 그 상처는 어떻고요… 죄는 우리가 몸서리 칠 만큼, 온 몸을 설레 설레 흔들 만큼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토해 낼 만큼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실제로 더럽게 느껴져서 토해 내어야(회개해야) 죄를 죄로 바르게 이해하고, 대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소리 높임이 없습니다. 듣기에 좋은 소리를 더 많이 합니다. 저부터 강대상에서 그리 죄에 대해서 많이 얘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대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죄에 대해서 둔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토네이도가 올 때 온 사방에서 다 경고음이 울리고, 대피하느라고 난리 법석을 떠는데, 영적 경고에 대해서는 울리는 소리도 없고, 소리가 들려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설명할 때 부부 관계로 설명한 이유는 가장 가슴에 와 닿으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죄는 피부로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쉽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신종플루 균에 대해서는 모두들 위생 마스크를 쓴다, 위생 비누를 쓴다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고, 방비 태세를 난리법석을 떨면서 갖추는 우리들이 정작 영적 죽음 바이러스인 죄에 대해서는 너무 안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자신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저부터, 너무 죄에 대해서 둔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3.
그런데 이 죄를 어떻게 이길까요? 부부 관계를 바울은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무서운 남편입니다. 바로 율법을 말하죠. 율법을 다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내인 성도들은 언제나 율법에 얽매이게 됩니다. 아무리 설거지 잘 해도 율법이라는 남편은 보이지 않는 선반 위를 손으로 쓱 훑어 보면서 먼지를 꼬집어 냅니다. 그렇게 점검하면 더럽지 않은 영역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늘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물론 죄를 죄로 깨닫는 것은 안 깨닫고 안일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대책이 없이, 늘 죄책감에만 사로 잡혀 있으면 이는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종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을까요? 부부 관계로 생각해 볼 때, 방법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남편이 죽든지, 아니면 아내가 죽든지. 이혼?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듯이 율법 혹은 양심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혼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둘 중에서 하나가 죽을 때 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남편, 즉 율법을 없앨 수 있나요? 없습니다. 율법은 삶의 기준입니다. 기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단 한가지 입니다. 아내인 죄인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옛 자아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여기서 ‘죽는다’라는 의미는 죄인 된 자아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기절 정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죽는 것(제가 밑줄에 볼드체에 따옴표까지 했습니다). 즉, 죄를 철저하게 죄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죄는 더 이상 나에게 건강한 삶을 주지 못한다고 철저하게 죄에 대해서 엄밀한 자세를 취하는 것. 죄를 죄로 철저히 여기는 것. 이러한 자기 부정, 자아 부인, 나의 (옛)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나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첫번째 단계를 밟아 가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분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표현이 있죠? 그만큼 죄에 대한 나의 옛 자아가 죽는다는 말은 더 이상 죄는 쳐다 보기도 싫고, 죄는 구역질해서 토해 내고 싶은 만큼 나의 삶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만나서 두 배 가득한 고기를 잡았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노력이 갖는 한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지식을 자랑함, 경험을 자랑함, 평생 살아온 자신의 인생 여정 자체가 철저한 한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은 죄를 철저히 죄로 여기는 고백입니다. 나는 그 죄를 몸서리칠 만큼 싫어 합니다. 죄를 토해 내고 싶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성도는 죄를 떨쳐 버리게 됩니다.
4.
그러나 그 다음 단계가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것은 나의 옛 자아가 죽음으로 인해 이제, 율법의 얽매임이라는 율법주의, 인본주의로부터 자유롭지만, 나는 혼자이기에 외롭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철저한 한계적 존재, 즉 피조물입니다. 스스로 일분도 공기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를 고아와 과부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은 가장 외롭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결혼과 연관해서 죄를 이기고 해결하는 법을 말합니다. 율법주의라는 포학한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옛 자아를 죽임으로(분리함으로) 자유롭게 된 신부는 이제, 새 신랑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분은 나의 모든 면을 다 이해해 줍니다. 나의 모든 약함을 감싸 줍니다. 나의 모든 삶을 인격적으로 대해 줍니다. 그래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날마다 살아갈 때 성도는 날마다가 ‘신혼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렇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신부 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살아 감으로 평생 감사, 감격, 기쁨이 넘치는 신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결혼 하신 분들은 한 때(?) 그렇게 행복했던 신혼 생활을 한 번 돌아 보십시오(물론, 결혼 한 이후 한 참 되신 지금에도 그러한 행복이 계속 되고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는 결혼은 그 신혼의 기쁨이 10년이 지나도 권태기는커녕 더 새로워 지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섬김으로, 돌봄으로 계속되는 부부 관계이기에 결혼 생활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 사랑이 깊어져 가고, 더 신선해 져 가는 것입니다.
이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죄에 대한 온전한 해결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자, 긴 글이었으므로 정리해 봅시다. 죄 해결을 중요합니다.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 자신의 개인 생활 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전도를 위해서도…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결혼 생활에서 음행은 돌 맞아 죽는 것과 같듯이, 죄를 짓는 것은 돌 맞아 죽는 것과 같은 심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십니까?
둘째, 돌 맞아 자신이 죽은 존재, 죽어야 되는 존재,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죄짓는 순간 인정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 자아 부정은 바로 나 스스로 죄를 이기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내 힘으로 죄를 이기려고 하거나, 계속 죄로 인해 얽매임 당하는 삶을 비로소 벗어나는 출발을 하게 됩니다.
셋째, 새로 결혼해야 합니다. 은혜의 당사자이신, 새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결혼해야 합니다. 남편을 두 명 둘 수는 없습니다. 전 남편(율법주의로 이끄는 율법)과는 이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 남편(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과 결혼해야 합니다.
넷째, 그렇게 죄로부터 분리된(이혼한) 삶과 함께 새롭게 결혼한 삶을 통해서 새 힘을 날마다 얻게 됩니다. 나의 모든 과거를 다 잊어 버리고 은혜로 받아 주신 그 분을 보며 감사로, 용기로, 기쁨으로, 풍성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그 삶의 기준, 즉 율법을 점차 지켜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분과 결혼 생활을 신나게, 늘 새롭게 함으로써, 이제는 성숙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과거 율법주의로 이끈 그 율법을 새 남편의 힘으로 온전하게 지키게 되는 진정한 성숙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단계를 가질 때 비로소 성도는 경건의 모양을 넘어 경건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6.
자, 이러한 모든 설명을 다 드렸는데, 지금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현장녀’입니다. 이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분명히 돌 맞아 죽어야 할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이 현장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돌을 다 한 손에 들고서… 이 여인은 자신이 곧 돌 맞아 죽을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현장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 앞에서 자신을 빼 돌려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여인은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다 돌아갑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한 마디에 여인은 다시 살아납니다.
돌 맞아 죽을 것이라는 그 순간. 여인은 죽었습니다.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자신의 철저한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살았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 결혼 한 것 이상으로 평생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의 인자함, 그 분의 보호, 그 분의 사랑, 그 분의 음성…. 자신의 가슴 속에 평생 담고 가는 그 삶은 바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부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말합니다.
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현장녀는 바로 여러분과 저, 성도를 말합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과의 영원한 신혼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배헌석 / pastorbae@gmail.com / www.aahope.net)
새벽 Q.T.
Dawn Q.T.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