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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에스겔1] “선지서를 더 읽어야 할 이 시대…”
“선지서를 더 읽어야 할 이 시대…”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1:3)
에스겔서의 시작은 바벨론의 2차 침공 5년이 되는 B.C. 593년이다. 이 때는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이 되는 시점이고, 남쪽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재임 기간이다. 나라는 거의 망해가는 상황이었고, 이미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상황이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다. 위기는 하나님 안에서 기회이다. 교회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그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좌절해도, 교회는 하나님 바라 보며 좌절해서 안된다. 그러나 쉬운 해결을 찾아서도 안된다. 바른 해결을 찾아야 한다. 선지서는 절망, 낙망, 좌절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꾸지람, 그리고 해결책이다. 이 시대와 동일하다. 교회는 어쩌면 세상 가운데서 방주의 역할을 하기 보다는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보인다. 교회마저 소망이 없으면 진짜 세상은 절망이다. 아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포자기 선언’, ‘될대로 되라’,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 등의 자조적, 포기적 고백이 현 시대의 모습이라 보인다. 그래서 선지서를 이 시대에는 더 읽어야 한다. 선지서는 미리 읽는 것이 좋고, 이미 타락한 때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미리 읽는다면 한국의 ‘땅값(집값) 수직 상승에 대해 별 대안을 제시 못한 땅값(집값) 수직 상승 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없었을 것이다. 토지 공개념을 제대로 선포한 선지서들을 미리 읽었다면, 한국 경제는 이렇게 요행위주, 금수저 위주의 개념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선지서를 읽어야 한다. 바르게 읽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선지서의 출발이다. 이 출발선에서 세가지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려는 해법이 제시된다. 첫째는, 소명의 변경 그리고 철저한 소명의식이다. 에스겔의 원래 직업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제 선지자로 부르신다. 평소에는 제사장의 직분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하나님과 연결, 백성들을 위로 격려하는 직분이다. 그러나 지금은 위기 상황이다. 포로로 끌려온 상황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육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 보게 된다. 하나님은 소명을 다시 부여 하신다. 상황에 맞는 선지자의 소명을 에스겔에게 주신다. 이 시대를 보자. 왕, 제사장의 역할을 교회가 그동안 해 왔다면… 어쩌면 이 시대는 교회가 선지자의 소명을 다시 받아야 할 지 모르겠다. 선지서를 다시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선지서를 진실하게 읽어야 한다. 선지자의 관점을 교회는 다시 뼈저리게 받아야 하고, 가슴으로 살아야 하고, 손과 발로 살아감으로 이 시대에 교회가 가져야 할 선지자적 소명을 다시 바르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 말고… 참 선지자로 살아가지 않는 한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둘째는, 그래도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에스겔은 1장에서 환상을 본다. 네 생물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는 동, 서, 남, 북과 같이 이 땅의 모든 곳에 있어야 할 상황을 말한다. 날개는 천사(스랍)를 상징하며,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한 것은 인격적 측면, 강력한 측면, 성실한 측면, 민첩한 측면 등을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갖는 강력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날개들이 서로 연하여졌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적 사역을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날개로 몸을 가렸다는 말은(11절)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 특성을 의미한다. 위기의 때, 절망의 때, 좌절의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성소(성전, 교회)이다. 타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곳으로 ‘지성소’를 성막을 통해 만들어 주셨다. 타락한 인류에게 예수님은 교회를 출구로 말씀해 주셨고, 그 교회의 출발은 십자가임을 선포해 주셨다(마태 16장).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회복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는 교회를 사용하신다. 교회를 다니는 모든 성도들이여! 오늘날 교회가 이토록 중요함을 기억하자. 교회를 쉽게 여기지 말자. 교회를 나의 천국행 티켓 확보처처럼 그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교회를 사교 집단으로 여기지 말자. 교회를 우습게 여기지 말자. 목회자들이여! 교회를 자기 출세의 장소로 여기지 말자.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교회가 절망을 소망으로 만드는 도구임을 잊지 말자! 교회가 절망에 빠진 세상에 더 큰 절망으로 빠지도록 그렇게 만들지 말자! 회개하자! 셋째, 성령님의 이끄심에 민감하자. ‘영(신)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12, 14절). 교회는 고정된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더 이상 유일한 성전이 아니다. 바벨론까지 교회는 옮겨 졌고, 그 교회는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옮겨지고, 역동적이 된다. 교회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예배당 건축하면서 ‘성전 건축’한다고 하지 말자. 그렇게 하면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좀 더 의미가 상당한 일을 하는 것 처럼 여겨져서 더 많은 헌금이 거두어지고, 더 많은 힘이 모아진다고 한다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교회는 장소도, 건물도 아니다. 심지어는 어느 한 집단의 유일한 자랑거리, 소유물도 아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집착에 빠져 교회의 본질을 잊어 버린 것처럼, 개교회 주의, 개교단 주의가 잘못하면 성령의 이끄심대로 장소와 건물, 인종, 집단을 뛰어넘는 가장 역동적 하나님의 도구임을 잊어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성령님의 이끄심에 늘 겸손하게, 민감해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늘 벗어나는 노력을 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개혁과 부흥의 방해가 된다. 방종에 열려있는 자세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본질회복에 늘 열려있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성령님의 이끄심에 대한 바른 겸손한, 깨어있는, 열려있는 자세이다. 선지서를 읽어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겸손히, 기도로, 가슴으로, 그리고 손과 발로 읽어야 한다 (매일 성경-새벽 묵상 / 에스겔서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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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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