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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에스겔3] “선지자가 두려움을 이기는 길”
“선지자가 두려움을 이기는 길”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2:8)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맞서야 할 이 세상의 실제 상황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향하여 ‘패역한 백성’(3),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4),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 거주하는 것’(6)과 같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으로 강한지, 무엇 때문에 두려운지, 어떻게 하면 그 무서움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 등과 같은 본질적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지를 가 보면 선교지에 있는 종교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일반 종교는 종교심이 강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또 다른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진리를 탐구하고, 도를 닦으려는 고귀하고도 숭고한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너무 값싸게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소중하고, 귀한 자세가 모든 종교 속에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지고의 노력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영원하고도 불변하는, 그리고 본질과 실존을 다 만족하는 절대적인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종교적 노력 속에는 사탄이라는 영적 존재가 실존함 또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등을 기본으로 삼고 각 종교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짧은 분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불교는 자기 깨달음과 자기 완성의 종교이고, 힌두교는 시간의 한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죽음 이후의 윤회적 삶을 기대하는 현실에 대한 자기 포기와 다음 세상(삶)에 대한 자기 염원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천국을 가려고 하는 유대주의가 변형된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다. 종교심이 인간에게 기본으로 있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영적 존재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동물은 육과 지,정,의 라는 정신적 기능만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결코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본성과 본능에 의해 삶을 육적, 정신적 기능으로만 살아갈 따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만이 영원한 것, 영이신 절대적 존재,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된다. 개가 밥 먹을 때 조물주께 감사 기도 드리며 밥 먹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밥 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을 따름이지, 먹기 위해 사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적 존재인 인간이 의지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것. 이것을 인본주의, 휴머니즘이라 한다. 그리고 이 인간 중심적인 자세에서 멋대로 만들어져 가는 세상의 모습을 세속주의(secularism)라 한다. 사실 선교지에 가면 가장 무섭고,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 세속주의이다. 이 세속주의가 모든 종교 속에 가장 더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고상한 점이 있다. 자기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자세이다. 그러나 그 불교 안에서도 더러운 물욕주의, 자기 중심 주의, 세속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이는 카스트 제도를 통해 가장 하층 계급이 결코 이 세상에서는 최고 상위 계급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종교의 가면을 쓴 더러운 이기주의가 힌두교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또한 또 다른 세속주의의 한 모습이다. 이슬람권에 가면 인간의 철저한 노력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손님을 친절히 접대하고, 라마단 기간 중 철저하게 금욕과 금식의 모습을 행하는 것 속에는 인간의 노력을 최대한 절대화 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인간이 철저한가? 인간이 그렇게 절대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라마단 기간에 오히려 더 많은 음식이 사용되고, 이슬람권 내부에 있는 더럽고 타락한 성적인 모습 또한 세속주의가 가장 무서운 세력임을 우리로 하여금 인정케 한다. 결국 선지자가 대면하고 직면하게 될 패역한 백성,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백성들, 가시와 찔레, 심지어 전갈 같은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말하는가? 자기 중심적, 종교심에 가득한 죄악 덩어리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현대 표현으로 하면 이들은 세속주의자들이다. 세속주의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세를 말한다. 인간 스스로 바벨탑을 쌓아가고, 그것을 파라다이스라고 지칭하는 자세를 말한다. 세속주의는 결코 다른 종교심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속에 절대적 구원, 절대적 기쁨, 절대적 행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한계를 힌두교가 극복해 주지 못한다. 힌두교의 한계를 이슬람교가 극복해 주지 못한다. 모두 인간에게서 출발한 한계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간의 종교가, 인간의 가치관이, 인간의 문화관이, 인간의 이념이 삶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문화가 될 때, 그 세계와 가치와 문화를 반대하고, 새로운 세계(하나님의 나라)와 가치(예배의 가치)와 문화(원수까지 사랑하는 삶)를 향해서는 처절하게 배타적이 되고, 평가절하하고, 소외 시키고, 단절시키려고 한다. 현 사회는 세속적 세계관, 가치관, 문화관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서 신앙인은 당황하고, 좌절하고, 포기한다. 가장 강력한 저항을 세상 속에서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라는 성경의 말씀 속에는 실제로 ‘두려움’의 상황과 모습이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 심지어는 세속가치관에 물든 타락해 가고 있는 개교회(모든 교회는 아니지만…) 들 안에서 조차 두려움을 갖게 된다. 교회 안에서조차 세속 주의 때문에 우리는 직분만능주의에 두려워하게 되고, 다수의 횡포에 두려워 하게 되고, 사람들의 의견에 두려워 하게 된다. 어쩌면 두려움의 상황이 된다는 것은 세속주의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고도 볼 수 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세속주의와 같은 배를 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오히려 두려움의 상황이 된다는 것이 실은 건강한 신앙적 자세를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성경은 이런 두려움 극복의 길을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가? 세속주의자들을 향하여 대적하고, 대항하고, 대면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항 대신에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에 더 초점을 둔다. 왜냐하면 세속주의는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자세, 모든 가치관을 말하기 때문이다. 세속주의를 이기는 길은 단 하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는 것, 즉 ‘신 앞에 선 실존자’(신앙인)이 되는 길 뿐이기 때문이다.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1).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경청의 자세가 중요함이 담겨져 있다.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8). 성경은 두려움 극복의 방법으로 적과의 대적 대신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그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을 벌리고 먹듯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향할 때,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실은 그 어떤 대적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보다 강한 존재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어떤 대상,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담대할 수 있다. 그렇게 성도가 강하고 담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사람들은 절대적 존재, 하나님의 존재를 보게 된다. 그 강함은 어떻게 대적을 대하는가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함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선지자가 나아가기 위해서,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반드시, 실제로 가져야 한다. 성도가 두려운 것은 세상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시간(관계)을 안 가지기 때문이다. (매일 성경-새벽 묵상 / 에스겔서 2:1-10)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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