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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시편4편] 최고의 전도지-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 (시 4:1-8)
[새벽묵상-시편4편]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 (시 4:1-8)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4:7)
이유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나의 잘못이든, 연단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이든 고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어려운 것이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나의 잘못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연단으로 인한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울 만큼 고난 중에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은 많은 경우 섞여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떤) 고난이라도, 고난 중에 내가 갖는 자세입니다. 다윗도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고난을 다윗은 시편을 통해 토하듯이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동병상련의
위로도 받고,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을 보며 소망을 갖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고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폄하하고,
비판하는 자들을 향하여 헛된 일을 구하고, 거짓을 구하는 것이라고 마음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2).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로
인해 범죄할 수도 있고, 폭력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도 있는 자들입니다(4). 그리고 어쩌면 다윗의 마음에 가장 큰 어려움은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6)
일반적으로
비판과 비난은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대안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일시적 대안은 가질 수 있지만, 영원한, 궁극적 대안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거나, 아니면 다른 일시적 대안으로 만족합니다. 그것이 종교를 찾는 사람의 기본 성향입니다. 어쩌면 도덕적 삶을 사는 것도 귀하고 소중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절대적 인간의 한계,
예를 들어 죽음 앞에 서는 실존의 한계적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정말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 섭리에 대한 인간의 가장 진솔한 자세인가?’ 아니면 ‘그냥 숙명처럼
받아 들이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자세인가?’ 등으로 많은 사상가들은 각자 대안을 내 놓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6절의 이 표현은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실존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내 놓는 동일한 물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진솔함을 함께 느끼도록 몇가지 성경 번역을 함께 나누면
아래와 같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이겠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묻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새번역)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공동번역)
신앙인은
이러한 실존적 한계를 표현한 절규를 들으며 같이 난감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인의 마음에는 자신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한 대응적, 반감적 자세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다윗의 시편에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는 다윗의 시를 보며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 어려운 마음을 상대방에게 퍼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퍼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변화, 채움 받은 다윗은 늘 결론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그 마음들이 많이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범죄하지 말지어다, 너희는… 잠잠할지어다’(4)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5)
이렇게
다윗의 마음이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자들을 향하여 중심이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심지어 6절에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남과 나’를 공동체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신앙이 주는 능력이라 믿습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결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의
대적자, 남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가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의 풍성함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처절하게 시작하지만, 가장 아름답게 끝맺음을 갖습니다. 이런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 방법과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자신에게로나, 남에게로
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만 향합니다. 1절에 보면 ‘곤란 중에 나를 너그롭게 하셨다’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죄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원수 되었던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입니다. 다윗은 그
은혜, 그 구원을 다시 한번 더 되새깁니다. 신앙인의 과거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곤란(범죄함의 고통)
가운데 은혜로 구원 받은 그 과거.
이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하나님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1절에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의지합니다. 그 은혜는 풍성하기에 곤란 중에 다윗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상황을 의지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합니다. 기도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3). (여기서 경건한 자는
다윗 자신이 경건한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시드’라는 ‘경건’은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자신이 죄사함받고, 구원 받았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다윗은 1절의 표현처럼 자신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한번 더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 구하는(의지하는) 기도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실제로 기도하니
다윗의 마음에 ‘주께서 두신 기쁨’과 ‘주께서 두신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7-8). 이 기쁨과 평안은 일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소유로 인한 기쁨과
풍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7). 풍랑 가운데서도 잠을 잘 주무신 주님의 담대한 평안이었습니다(8). 그래서 상황의 변화에 관계 없이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강력한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다윗은
하나님을 향함으로 세상의 상황을 극복하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넘쳤기에 대적자들을 향하여 ‘우리’라고 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대결구도를 ‘인간 대 하나님’으로 다가갈 때, 사랑하지 못할 원수가 없고, 극복하지 못한 난관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으로 채움 받은 절대적 기쁨과 평안이 있을 때,
세상의 참된, 궁극적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늘 항상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전도지는 종이에 적힌 글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기쁨과 평안이 가득찬 ‘나의 삶’ 자체 입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나눠서 송구하지만… 저의 오늘 묵상 글 나눔임을 양해 부탁 드리며…)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이 생일에 한번 겸손히, 진지하게 결단/기도 드립니다. 저의
매일과 평생의 삶이 ‘주께서 두신 기쁨과 평안이 가득찬 전도지의 삶’이 되기를 결심하고,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매일 성경-새벽 묵상 / 시편 4:1-11)
| 첨부파일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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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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