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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침 기도회/배헌석 목사] 밭 비유인가? 씨 비유인가? 씨 뿌리는 자 비유인가? (눅 8:1-15)
[새아침 기도회/배헌석 목사] #씨_말씀 #밭 #농부 밭 비유인가? 씨 비유인가? 씨 뿌리는 자 비유인가?
밭 비유인가? 씨 비유인가? 씨 뿌리는 자 비유인가?
오늘 본문은 유명한 비유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적용하기가 쉬운 비유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도 이 비유를 조심스럽게 다가가곤 합니다. 저 또한 그런 조심스러움의 자세를 갖고 함께 나누기를 원하며, 또 깨닫는대로 서로 나눔으로 더 합당한, 더 실천적인 말씀 생활로 인도함 받기를 원합니다.
제목에서 함께 나눴듯이 이 비유에 대해서 네가지 밭의 비유라고 하기도 하고, 씨 비유라고 하기도 하고, 씨 뿌리는 자 비유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세가지 제목들을 여러 설교 혹은 주석 및 신학 서적 등에서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긴 하지만, 적어도 제가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겠다는 나름의 정리를 해 봅니다.
첫째는, 적어도 이 비유를 ‘남’을 향한 말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4가지 밭(길가, 돌짝, 가시, 그리고 옥토)이 나오기에 자칫 다른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길가 같은 사람’ ‘돌짝 같은 사람’… 등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과 삶을 평가하는 안내서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8)는 말씀 처럼, 이 비유는 ‘나’에게 주시는 비유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 되는 것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 입니다.
둘째는, 4가지 밭을 나 자신에게 적용해서 살펴 보는 것은 좋은데, 말씀을 튕겨 내는 길가 같은 무심한 밭에서, 적어도 말씀을 받는 (얕은 흙이라도 있는) 돌짝 밭으로, 그리고 줄기라도 자라는 가시밭으로, 그리고 모든 내면의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는 옥토밭으로 나는 바뀌어야 한다 라고 자신의 내면적, 윤리적, 정서적, 성숙으로의 변화되는 자아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내 마음 밭이 변화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11)의 능력에 초점이 가 있는 비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의 내면이 깨지고, 변화된다는 말씀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씨 비유’라는 제목에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 나름, 이렇게 이 비유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 말씀의 능력(씨)을 깨닫고, 말씀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길가 밭은 딱딱한 밭, 즉 내 마음에 세속적 이념이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씨앗이 들어올 틈이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 이념은 범죄 이후 마귀가 만들어 온 세속 나라, 인간 나라, 바벨탑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속 이념에 실은 물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 세속 이념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 종교나, 고차원의 철학이 세속 이념을 구원시킬 수 없습니다. 죄성의 인간이 만든 종교나 사상은 그 안에 자체 한계가 있고,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찔러 쪼개서 관절, 영, 혼을 변화 시킵니다. 죄를 이기고 해결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돌짝밭은 감정적으로, 이기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기복적으로 말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을 말씀으로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의적 해석, 감정적 말씀 대함의 자세를 갖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으로 세상적, 세속적 축복의 도구로 말씀을 사용하면 말씀을 복채 놓고, 점집에서 말씀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부적 대하듯이 말씀 대하는 자세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축복 위주의 신앙 생활을 하다 하나님께서 ‘헌신’하라고 하면 마음이 닫히거나, 도외시 하는 것은 말씀을 자기 위주로 대하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 신앙의 성장이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시밭은 당연히 신앙 생활 하다 염려나 유혹, 재물의 추구 등의 상황이 생겨도 진정한 말씀의 본질을 이해할 때 담대해지고, 유혹대신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이겨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 자체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할 때 말씀 자체가 갖는 진리의 자유케 하는 능력, 생명과 풍성함과 지혜로 인도함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씨)을 바르게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첫번째 내용과 거의 동일하지만… 결국 신앙 생활은 열매를 맺는 삶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5).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 입니다. 그것도 기복적 축복이 아니라, 진정한 성숙한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전인적 변화,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풍성의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기도와 기대로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님 의지할때, 말씀은 우리의 내면과 실제 삶, 그래서 전인적으로 변화(열매 맺는 삶)시켜 줍니다.
셋째, 이 부분은 저의 개인적 묵상이기도 한데요… 좋은 땅에 뿌려진 열매를 ‘백배의 결실’이라고 했습니다. 백배의 결실은 단순히 풍성한 결과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이렇게 풍성한 결실의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기독교는 ‘개인의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는 기복 종교처럼만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100배의 열매는 그 안에 모두 다시 땅에 뿌려 질 때 싹을 트고, 또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는데, 그것이 내가 먹고 살 만한 것 보다 100배로 많게 된다면 나 혼자 다 먹는다면 진짜 이기적인 종교 아닙니까? 그 열매 중 필요한 일용할 양식 외에는 다시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더 열매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을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의 헌신하는 삶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를 ‘씨 뿌리는 자’ 비유라고도 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이 씨 뿌리는 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시고,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받고, 열매 맺게 된 성도라면, 성도는 목숨 걸고, 이 말씀을 또 이 세상에 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씨 뿌리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면 저는 이 비유를 제대로 묵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쉽지 않은 묵상 나눔이지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비유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 다 나와 있는 비유입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적어도 제가 저 자신이 이해한 부분을 오늘 가슴에 새기고 살기를 원합니다.
저 자신에게 이 비유를 적용하면서, 씨앗인 진리의 말씀을 진실하게, 진지하게 붙잡고, 저의 삶을 다 수술하는 도구로 의지하며, 순종함으로 열매 맺는… 그래서 그 열매의 능력, 즉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자로서 삶으로, 가슴으로, 진심으로, 간절함으로 말씀 증거하고 전하는 목회자, 성도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매일 성경 새아침 기도회 묵상: 눅 8:1-15)
앤아버 소망 교회 ‘줌’
주일 예배 @ 2 PM / 새아침 기도회 @ 6:30 AM / 수요 성경 공부 @ 7:30 PM
새벽 Q.T.
Dawn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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