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사순절 묵상]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 5일째 (2025년 3월 10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적 순례 40일 / 5일째
[묵상할 말씀] 눅 12:22-34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도 말라…”(눅 12:22, 29)
[묵상]
사순절 기간 5일째 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말하기에 주일에는 따로 사순절 묵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일 예배때 받은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붙잡고 생명으로 살아감이 맞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죄와 고난의 과정에 대한 묵상 없이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므로, 사순절 5일째, 더 깊은 묵상으로 함께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도 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는 ‘무서워 말라’고 하시며, 또 본문 곳곳에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6), ‘하물며 너희일까보냐’(28), ‘믿음이 작은 자들아’(28) 등과 같이 좀 더 간곡하면서도, 강력한 염려와 근심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삶의 많은 영역에서, 또 자주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스트레스가 쌓이고, 왜 불만과 불평이 쌓이며, 왜 우울증과 심각한 정신병까지 걸리게 되는 것일까요?
수많은 현대인들이 항우울제를 복용하며 하루 하루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수면제를 복용해야만 잘 수 있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정 폭력, 사회 폭력, 가출, 부정, 비리 등이 일어나는 이면 속에는 그 어떤 문제가 있길래, 무엇이 참된 해결책이길래 이런 문제가 계속 벌어지는 것일까요?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과 ‘근심도하지 말라’라는 표현 속에 그 염려와 근심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염려(merimnao 가 어근)’라는 표현에 담긴 원어적 의미는 ‘a part, as opposed to the whole’ ‘divided into parts’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전체가 가야 할 방향에 반(대)하는 부분적 관점 혹은 전체 안에 있는 각 파트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즉, 마음이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각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전체가 나가야 할 방향 대신에, 시시각각, 상황따라 보이는 것에 따라 내 마음이 상황적 반응(reaction)으로 나아가게 되면, 내가 정작 나아가야 할 방향과 다르기에, 마음에 ‘여러 방향’이 되고, ‘틀린 방향’이 되고, 그로 인해 ‘염려’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근심도 하지 말라’라는 말에 나오는 ‘근심(meteorizo가 어근)’은 그 원어적 의미가 ‘suspended in midair’, 즉 ‘허공에 매달린’, 즉 ’to shift from one "conviction" to another’ 과 같이, 확신이 없기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계속 변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어느 하나를 믿고, 확신을 가지고 의지했는데, 그것이 절대적인, 영원한 것을 주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허공에 뜨듯이 그렇게 안정감을 갖지 못하고, 계속 이리 저리 변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염려와 근심은 절대적이지 못한 것, 근원적이지 못한 것, 영원하지 못한 것에 내 마음을 주었을 때, 생길 수 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 삶에 근원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한… 나는 염려와 근심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진솔하게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나의 추구가 절대적이고, 근원적이고, 영원한 것이 되지 않는 한은 계속 불안하고, 계속 걱정하고, 계속 염려하고, 계속 근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먹을 것, 입을 것을 예로 드십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는 삶에서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은 이 문제로 우리는 많은 수고와 노력과 염려를 행합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근거가 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본질만 추구한다면 이는 말만 행하는 미학일 따름이며, 그러한 형이상학은 실제 삶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브루조아 사상일 따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실존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실존만 주장하는 것 또한 인간 실존을 위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면서 갖게 되는 인간을 향한 자세 또한 인간의 전인적 존엄성을 무시하는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집요하게,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음식(먹는 것)이 중요하냐? 먹는 것의 대상이 되는 목숨이 중요하냐? 입는 것이 중요하냐? 입는 것(의복)의 대상이 되는 몸이 중요하냐?
좀 더 본질을 찾아갈 때, 우리는 부분 혹은 변동적인 삶의 부침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분명, 음식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목숨입니다. 의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묵상의 깊이를 더 해야 합니다. 음식보다 중요한 것이 목숨이라면, 목숨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의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몸이라면, 이 몸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러한 묵상을 위해서 예수님은 까마귀를 사용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까마귀는 부정적인 새입니다. 그 까마귀는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는데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기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그 (부정적인) 까마귀와는 비교할 수 도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보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은 들풀(백합화) 또한 가장 아름답게 입혀 주시는데, 하물며 사람 또한 하나님께서 삶을 아름답게 인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까마귀와 들풀이라는 반어법을 통해서 더 강력하게 사람을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강력한 긍정을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즉, 이 두가지 강력한 반어법을 통해 결국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즉, 하나님께 내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평안, 기쁨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두지 않는 모습은 두가지로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첫째는, 근원적이지 않은 것에 내 마음을 두게 될 때. 즉 목숨(실은 목숨을 주신 하나님)보다는 먹을 것에, 몸(실은 몸을 주신 하나님께) 보다는 입는 것에 내 마음을 두면, 결코 염려와 근심을 그칠 수 없게 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명품에 내 마음이 계속 가는 한은 결코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형 수술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해서 외모를 더 가꿀까를 계속 생각하는 한은 결코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파트 평수를 더 많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내 마음을 두는 한은 결코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류 대학, 일류 직장 등에 내 마음을 두는 한은 결코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생각을 나 중심으로 할 때 또한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라고 하셨는데, 여기서의 의미는 염려하는 주체가 ‘내’가 되는 한은 결코 염려와 근심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묵상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한 자’(팔꿈치에서 손끝)의 길이를 자신의 키에 더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모든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고, 그 결과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인생의 주인’자세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키 ‘한 자’도 늘리지 못하는 자입니다. 목숨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연장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는 뻔하게 ‘염려’와 ‘근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든 것의 근원자, 절대자, 영원자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 분이 내 삶의 기준이 되시고, 공급자가 되시고, 의지 대상자가 되시고, 나의 전부가 되실 때… 비로소 나의 삶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자세를 스스로 갖게 됩니다.
그 분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공급과 평안은 절대적 비교, 절대적 평가, 절대적 공급, 영원한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나라만’을 구해야 합니다!
.
.
.
그런데 묵상은 여기서 그쳐서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만을 구하는 사람에게 오는 참된 기쁨과 풍성의 증거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삶을 말합니다.
본문의 초반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 절대적 하나님을 나의 의지처로 삼게 될 때… 진정한 기쁨과 풍성함이 생기게 되고, 그 결과는 당연히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게 됩니다.
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 눈 의식하며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쁨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구제의 의미와 자세입니다.
이러한 구제의 모습은 참 자유의 모습입니다. 이 참 구제의 모습이 없다면… 나는 아직도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진실한, 진리에 입각한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행함으로 연결됩니다. 참된 행함은 참된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오늘의 적용] 사순절 기간 동안, 진리에 의한 가장 왕성한 섬김의 삶 살기를 바랍니다.
* 묵상이 제대로 되었다면… 내 소유를 팔아 구제할 대상을 찾고, 기도하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오늘 실천/순종해 봅시다. 많든, 적든… 마음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는 것이 진정한 구제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대상이 되는 영혼을 존중하며 구제하는 것이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목회칼럼
Pastoral Column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